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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13. 2020

기억의 상자 (6)

기억 에세이 - 1996년 3월 


고등학생이 된 나는 야간자율학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첫 주의 주말에는 내내 잠만 잤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이 학교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지. 저녁을 먹을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아닌지.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밤이 되면 그것이 역시 공부일지라도 내가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닌지. 


평일에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주말에는 낮잠을 잤다. 그러면 으레 가위에 눌렸다. 분명 귀신이라고 생각되는 기이한 형체를 보았고 무언가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 얼른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손을 까딱할 수도 없었다.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 죽지 않았고 잠들지도 않았으나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그 괴이한 순간이 주로 몇 초, 아니 몇 분간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이상한 잠은 몇 번 경험했다고 해서 그다음 경험이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번 새롭게 시작되는 지옥이었다. 온 힘을 소진해 눈을 뜨고 결국 정신이 돌아오면, 몸에서 피가 한 컵씩은 빠져나간 것처럼 피로했다. 가위눌림은 3년 내내 이어졌다. 


학기 초에는 늘 마음을 짓누르는 숙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담임에게 가족관계 말하기. 1학년 담임은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생물을 가르쳤고, 동아리 활동으로 에스페란토어라는 생소한 언어를 공부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아이들을 친근하게 대하는 편이었고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한 유머도 갖추고 있었다.   


3월의 어느 날, 그는 우리 반의 가정환경을 조사해야 한다면서 말했다. 엄마 안 계시는 사람 손 들어봐.


아이들이 술렁였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누군가 큰 소리로 항의했다. 뭐 어때? 어차피 너희들끼리는 다 알잖아. 담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눈이라도 감고 해요.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은 한 번 더 교실 안을 울렸다. 엄마 안 계시는 사람.


아이들은 눈을 감은 채 누가 손을 드는지 궁금해했다. 눈을 감았다 해도 옆이나 앞, 뒤에서 누군가 손을 들면 공기가 움직이고 옷자락이 바스락거릴 것이었다. 나는 엄마 안 계시는 아이가 정직하게 손을 들고 있는지 궁금했고, 엄마 다음은 아빠일 텐데 내가 과연 정직하게 손을 들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비참해지고 있었다.


아빠 안 계시는 사람.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고민했다. 내가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담임이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제대로 카운트가 되지 않으면 행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어쩌면 결손가정의 아이에게 베풀어질지도 모르는 약간의 혜택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맞는 판단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눈을 떴다. 담임이 교실을 나갔다. 그날의 결손가정 조사가 정확하지 못한 조사로 끝났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 말고도 한두 명쯤은 더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손을 들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면. 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처럼 몸이 얼어붙은 아이가 있었다면.   


학급당 학생수가 많던 시절이었다. 인터넷이나 핸드폰이 아직 상용되지 않던, 교사가 학생에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던 시절이었다. 담임이 무슨 말을 하든 아이들은 집에 가서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어떤 말을 전했다고 한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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