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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14. 2020

기억의 상자 (7)

기억 에세이 - 2006년 5월 


비행이 시작될 무렵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 가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시드니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다. 그냥 휴가를 떠나는 것일 뿐이라고. 대단하네요. 그게 뭐가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약간의 경계심을 보이며 더 이상의 대꾸를 않자 그도 실은 관심 없었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나는 옆동네에 놀러 가듯 캐리어 하나 끌지 않고 시드니에 갔다. 5월이었으니 그곳은 가을쯤일 테고, 두꺼운 옷은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 3박을 할 예정이었으니 날마다 옷을 바꿔 입을 필요도 없었다. 화장품은 샘플을 챙겨가면 되었다. 지갑과 여권 외에 달리 필요한 물건이 없었다. 옆으로 메는 작은 가방 하나와 손에 드는 가방 하나를 갖고 비행기에 올랐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벼락이 치는 게 보였고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체감상으로 너무 오랫동안,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좋지 않았는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승무원이 다가와 무언가를 마시겠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10시간은 길었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뒤 직원에게 호텔 쪽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는 곳을 물어보았다. 나는 익숙지 않은 호주 발음을 이해해야만 이곳에서 무탈하게 지낼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작은 버스에는 한국사람도 몇몇 타고 있었다. 내가 내릴 곳은 차이나타운 근처였다. 운전기사가 나에게 짐을 내려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내릴 짐이 없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버스에서 내려 혼자가 되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조금 헷갈렸다. 몇 년 전 어학연수 시절 몸에 배어있던 습관대로 지나가던 현지인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 남자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나를 안내했다. 순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환대의 도시에서 6개월 간 생활했던 나는, 내가 도움을 청한 현지인이 남자든 여자든 한국사람보다는 친절하게 나를 도와줄 거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도착한 길 근처에 과연 내가 묵을 호텔이 사진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프런트를 지키고 있었다. 작고 소박한 호텔이었다. 그 남자는 호텔의 주인 같아 보였다. 체크인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던 나는 졸음이 쏟아지고 온몸에 피로가 덮여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짐을 맡긴 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으로 출입문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호텔에 묵고 있는 듯한 서양인 한 명이 문 앞에 서서 건너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몸의 다른 부위는 움직이지 않고 엉덩이만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신비로울 정도로 절도를 가진 동작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마 그녀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댄서이거나 태어날 때부터 그런 춤의 유전자를 받고 자라난 사람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광경은 마치 내가 도착한 이곳이 시드니가 아니라 열대의 어느 섬나라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녀는 어느 나라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걸까. 


내가 외국에 왔구나. 이곳에는 내가 나고 자란 도시의 사람들과는 완벽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구나. 어디로든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춤을 추고 있던 여인이 차지한 자리의 반대쪽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옆동네에 잠깐 나온 것처럼 심상한 말투로 전화를 건 나에게, 엄마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깨끗하게 잘 들린다며 정말로 호주에 있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웃었다.  


몇 년 전 밴쿠버에서 맡았던 특유의 공기 냄새가 났다. 커피와 향신료, 향수 냄새에 나뭇잎 냄새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그리웠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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