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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16. 2020

기억의 상자 (8)

기억 에세이 - 2006년 5월 : 2 


체크인을 마친 뒤 방에 짐을 내려놓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놀랍게도 프런트의 직원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문을 잠그지 않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든 내가 대답이 없자 방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그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그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를 위해 지도를 가져왔다며 그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내가 방으로 올라오기 전 프런트에서 했을 어떤 질문에 대해 그가 곧바로 대답해주지 못했었겠지. 지도에 동그라미를 표시해가며 길을 알려준 그에게 나는 비몽사몽 간에 고맙다고 말했다. 


바깥으로 다시 나갔다. 그냥 길이 나 있는 대로 걸었다. 그러기 위해서 10시간을 비행해 그곳으로 간 것이었으니까. 바깥에 테이블이 놓인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작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키가 크다. 그것이 내가 호주 사람들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캐나다 사람들보다 10센티미터 이상은 훌쩍 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저 인상일 뿐이었다. 내 눈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거나 키가 더 커 보이는 방식으로 옷을 입은 것일 수도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무한한 자유를 보장했지만 그만큼의 제약이 있었다. 나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혼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음식을 파는 작은 식당에서조차 혼자 앉아 식사를 하기가 주저스러웠다. 편한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맥도날드로 들어간 나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각선 자리에 직장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신문을 보면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아저씨를 몰래 찍었다. 그는 양복을 입고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표준의 남자였고 나는 그런 모습을 가진 보통의 서양인 남자를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왔었다. 그들은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주인공의 친구일 경우가 많았다. 살면서 수천 번은 봐온 것만 같은 그 무해한 평범함이 마음에 들었다.



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시드니 지역의 주요 볼거리가 있는 장소에서 자유롭게 내렸다가 언제든 다시 탈 수 있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여행객인 건지, 5월의 평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비치발리볼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은 나른해 보였다. 


혼자여서 좋은 점이 있었다면, 마음에 떠오른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일생 중 자주 오지 못할 여행의 정서를 오염시키지 않은 채 오롯이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조금은 답답했다. 와, 정말 좋다! 라고 아주 단순하게, 한 번쯤은 말로 내뱉고 싶었다.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보였다. 해수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한, 관광지에서 흔히 보일 법한 발랄하고 즐거운 물건들이었다. 나는 앞면에 'Bondi Beach'라는 글자와 함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이가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갓 태어난 아기의 몸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언니는 임신 중이었다. 엄마들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그런 티셔츠를 입히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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