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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20. 2020

기억의 상자 (9)

기억 에세이 - 2007년 9월


대부분의 스탭들은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어떤 일에 참여하고 있는 건지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평소 사무실에서 직접 마주할 일이 없던 프로그래머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그해 영화제의 특징과 상영작, 내세울 만한 행사 들을 소개했다. 


영화제 사무실에도 까다로운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개막이 코앞에 다가올수록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예민해져서 간혹 소리를 지르거나 서로 싸우기도 했다. 담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무실에서 비흡연자는 나를 포함해 겨우 몇몇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영화제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예민해진 채 많은 것을 준비하고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잘 되던 때였다. 해변에 수많은 홍보 부스가 세워질 예정이었고 초청작과 게스트의 화려함은 매번 이전 해의 그것을 갱신하고 있었다. 게스트 배지를 달고 참여하는 손님들에게는 협찬사에서 제공한 선물들이 양손 가득 주어지던 때였다.


전쟁터였던 사무실의 사정과는 별개로 기자회견은 멋졌다. 그리고 그 자리가 정리될 무렵, 사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 나는 누군가와 재회했다. 나는 그 아이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출석번호가 나란히 매겨졌으므로 학기 초에 짝이 되었다. 첫날, 그 아이는 내 옆에 앉으면서 "안녕!"하고 발랄하게 인사했다. 붙임성이 좋은 아이와 짝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그 아이는 온몸에 가시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1년 내내 하이톤으로 나를 괴롭혔다. 일부러 나를 괴롭히자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 터였지만, 그 아이와 나는 물리적으로 늘 가까이 있었고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연일 나는 그 아이로 인해 괴로워했다. 


아끼던 머리핀을 보여주자 그 아이는 그것의 한쪽 끈을 잡고 책상 위에 탁탁 쳐 충격을 가하더니 플라스틱 부분을 부숴버렸다. 그것이 정말로 부서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던지 그 아이는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곤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본드로 붙여온 뒤 나에게 돌려주었다. 좋아하던 영화배우의 사진을 보여주자 자신은 그 배우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곧바로 사진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웃었다. 


그 아이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관심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었다. 외모도 평범했다. 학생으로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교실 안의 주요 인물들에게 웃음거리나 시빗거리가 될 일도, 질투를 살 일도  없었다. 선명하지 않았던 그 아이의 가시는 가까이 다가간 사람에게만 보였다. 그것은 살면서 발현된 병증이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참았다. 악을 쓰며 싸우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일들이었다. 방금 내가 눈앞에서 본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황당해하고만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고3이었고, 어떤 일도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시끄러워진 그 일의 여파가 수능시험을 망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 아이는 꽃을 남달리 사랑했다. 남이 아끼는 물건을 눈앞에서 부술 수 있던 그 아이는 시들어가는 꽃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청소시간에 시든 꽃을 버리려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슴 아파했다. 그 아이가 하이톤으로 꽃에 대해 가슴 아파할 때면 공기가 비명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나쁜 방향으로 진동하는 공기를 타고 가시가 날아와서 내 귀에 박혔다.     


그 아이는 기자가 되어 있었다. 명품을 다루는 잡지의 부산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라색 톤의 아름다운 치마를 입고 있던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주는 일. 그것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그 아이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 아이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학생과 교사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다. 공부를 잘하지 않는 아이는 글을 잘 쓸 리가 없었고, 그 아이가 어느 과제에서 잘 쓴 글을 제출했었다 해도 공부를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글은 교사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람을 취재하고 매력적인 글을 써내는 일을 하는 기자는, 내가 상상했던 그 아이가 가질 만한 직업 중 가장 멀리 있는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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