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에세이
한때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특별한 걱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잠들기가 힘들었고 때로는 누워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졸음과 피곤이 몰려온 후에도 정작 잠이 들지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다음날이면 한밤중 내게 일어난 그 불가사의를 시간 단위로 분석하고 납득하느라 더욱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것과 내 몸이 잠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하루 종일 잠에 대해 생각했다. 잠을 상상하고 갈구하면서도 잠을 두려워했다. 해가 지며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곧 다시 잠들기를 수행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신경이 바짝 조여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울해졌다. 살아가는 것의 의미에 강한 의문이 들었다.
가장 이상했던 건, 내가 잠에 매달리면서도 잠을 내쫓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는 잠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자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잠들어버리면 잠에 관해 잊을 것이었다. 잠이 들 것 같으면 그 순간을 의식한 머릿속 어딘가에서 잠을 스윽 밀어냈다. 당시 나에게 불면은, 반드시 쫒아야 하는 동시에 어쩐지 놓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정신이 피폐해져도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내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고, 나는 별일 없다는 듯 출퇴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불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결과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는 갱년기 이후 찾아온 불면증을 2주에 한 번씩 정신과에서 타오는 수면제로 해결하고 있었다. 수면제를 먹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활력 있게 하루를 보내고 걱정 없이 잠들었다.
사람들은 약에 대한 의존과 중독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그렇지만 그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딘가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건 의존이 아니라 불면에 있는 것 아닌가. 매일 규칙적으로 두세 알의 약을 먹어야만 잠든다는 것이, 잠을 자지 못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오토바이를 피할 기동력을 잃고 휘청이거나 심지어 죽고 싶어지는 것보다 나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는 먹고 있는 약의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주었고 나는 그 사진을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의사는 말했다. 어머니는 60대시지만 J씨는 젊잖아요. 수면제를 매일 드시면 안 되죠. 3개만 드릴게요.
나는 수면을 유도한다는 백색소음을 들려주는 어플을 깔았다. 수면을 돕는다는 요가 동작을 따라 했다. 누군가 감태라는 해조류에서 잠을 자게 하는 물질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것은 이미 비타민제처럼 상품화되어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그것을 사서 목표 수면 시각 몇 시간 전에 먹었다. 호르몬에 관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멜라토닌을 먹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이미 엄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자기 전에 꿀을 한 스푼 먹었다. 꿀은 인간의 몸에 유익한 점이 많은데 숙면에도 도움을 준다고 했다.
사람들은 불면에 관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하지만 해결책에 관해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불면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불면은 사람을 지껄이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입을 다물게 한다. 그것은 몸과 영혼이 매우 음침한 방식으로 협업해 한 존재를 곤경으로 몰아넣는 현상이기 때문에, 불면을 원인으로 하는 우울은 누군가에게 설명되기조차 어려웠다. 잠드는 것이란 물건을 집기 위해 손을 뻗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으므로 잠 못 드는 것 또한 손을 다쳐 물건을 집지 못하는 일과는 달랐다. 잠드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면이 진행 중일 때 나는 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자꾸 깨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악몽 따위가 괴롭힌들 잊으면 그만이었다. 악몽을 꾼다는 것은 적어도 잠으로의 진입까지는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나의 경우 진입이 불가능했다. 잠의 문턱에서 무언가가 가로막고 서서 나라는 존재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어쩐 일인지 그 벽을 뚫고 잠 속으로 진입하는 날들이 존재했다. 새벽 4시에 깨어나서 4시간이나 잠을 잤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날들이 있었다. 어떤 날은 5시쯤 겨우 고통스럽게 잠들어 7시에 깨어났다. 어쨌든 출근을 해야 했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밤 10시가 되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다가 졸음이 쏟아지면 얼른 책을 덮고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어떤 날은 성공했고 어떤 날은 별 소용이 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꾸준히 읽었다. 그럭저럭 내리 몇 시간을 자는 날들이 늘어갔다. 나는 달력에 잘 잔 날, 다음날이 그리 힘들지 않을 만큼은 잔 날, 거의 못 잔 날, 수면제를 먹은 날 들을 표시했다. 한 달이 지나면 수면의 흐름을 헤아리기 위해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흐름이랄 것이 없었다. 불면은 그냥 거기에 있다가 나를 덮치고 싶은 날엔 덮치고 귀찮은 날엔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이제 나는 잠에 관한 한 달력에다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두어 달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7개의 수면제를 받아온다. 그것을 소중히 세어가며 정말로 힘든 날이면 반 알을 먹고 잠을 청한다. 반 알을 먹고 잠들지 못하면 반 알을 더 먹는다.
불면이 남기는 그림자는 어둡고 불쾌하다. 우연히 미디어에서 듣게 되는 불면에 관한 지침 또는 불면증에 좋다는 제품의 광고 문구와 마주치는 일은 꺼림칙하기 그지없다. 그런 것들은 여전히 지척 어딘가에 존재하는 불면에 대한 증거로써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잠에 관해 대화하는 것도 두렵다. 가슴 깊이 묻어두고 싶은 공포심이 수면 위로 찰랑, 하고 떠오르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병을 안고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듯, 나는 이제 불면이 아니라 불면에 대한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한 가지 얻은 점을 꼽으라면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토로를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그럴 때면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 위에서 불면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기척이 느껴진다. 잠 못 드는 사람과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선 나는 몇 걸음을 걷다가 다시 테이블 쪽을 뒤돌아본다. 숨바꼭질을 하듯 어딘가로 숨어버린 불면이 채 감추지 못한 꼬리를 발견한다. 그것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침착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잠을 잘 자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불면이 우리를 따라올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두렵지만, 두려운 채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