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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Oct 30. 2020

소설 <이바나>의 기억

<이바나>를 만든 '이마고' 출판사의 편집자와 디자이너님께 부침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불의의 사고로 내 방이 불타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잃은 것에 대해 가장 가슴 아파할까. 그런 상상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소설 <이바나>이다. 물론 어떻게든 다시 그 책을 구할 수야 있겠지만, 15년을 나와 함께해온 바로 그 <이바나>일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2000년대 중반,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한 소설가의 인터뷰와 함께 그녀가 연재하는 소설의 일부를 읽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마 일정 금액을 결제하면 전체를 읽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일부만 맛볼 수 있도록 해놓은 서비스였던 것 같다.


그 소설은 어딘가 독특했는데, 그 이전에 작가가 독특했다. 그녀는 병무청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따로 갖고 있었다. 곧 일을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그 인터뷰를 처음 보았을 무렵까지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타자 연습을 위해 써 내려간 소설로 등단을 하다니.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이트에 연재되던 글은 여느 소설과 달랐다. 독특하냐 아니냐 문제보다도 그녀의 문장은 어딘가 불완전해 보였다. 종이책이 아닌 인터넷으로 먼저 읽어 그런지 '인터넷 소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등장인물의 이름들은 죄다 이상했다. 분위기는 시종일관 투박했고, 인물들 사이에는 내내 싸움이 일어날 듯했지만 그건 드라마틱하다기보다 그저 퉁명스럽고 못나게만 보였으며 묘하게 연극적이었다. 대사를 그런 식으로 쓴 소설을 그제껏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굉장히 이상한데 그 이상함이 재미있었다. 소설의 제목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었다.


전후 사정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 작가를 처음 접한 계기가 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보다 <이바나>를 훨씬 먼저 주문해 읽었다. 처음에는 좀 헤맸던 걸로 기억한다.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완독에 성공했고, 얼마 후에는 마음에 드는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가면서 다시 읽었다. 나는 거의 모든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있었다.


배수아의 소설은 막 등단했을 때와 그녀가 독일에 머문 시간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던 시절, 그리고 창작보다 번역 활동에 푹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최근작까지의 분위기가 각각 다른데, 그중 독일어를 배우던 개인적인 경험이 스며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소설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그 시절에 관한 나의 억은 이제 막 서울에서의 자취를 시작했던 2004년의 이문동 어느 골목, 방음이 되지 않던 좁은 방에서의 기억이. 그 방에서 나는 <에세이스트의 책상>과 <독학자>를 열심히 읽었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낯설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했다.


온라인을 통해 책을 주문하는 일은 책과의 만남에 관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한다는 이유로 폄하되곤 하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한 권씩 주문해두는 일은 그 시절의 나에겐 꽤 중요한 일상이었다. 다음날 어김없이 방문 앞에 도착해 있던 책의 존재는 처음 서울생활을 시작한 내게 적지 않은 위로를 주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자이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방 한 칸이지만 주소를 가졌다는 사실의 증명이기도 했다. 그 증명 가운데 <에세이스트의 책상>과 <독학자>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 책의 디자인이 독특하다고 느껴왔지만 책의 물성이 가진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을뿐더러 형태보다는 내용의 강렬함에 훨씬 더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이바나>의 만듦새에 관해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점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만듦새가 독특하다. 우선 일반적인 판형에서 벗어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책들의 판형이 대부분 큰 편이었지만 당시로서 이 책은 꽤 아담한 사이즈였다. 그에 비해 너비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본문 옆 여백은 꽤 넉넉하다는 인상을 준다. 본문 페이지의 밑단에는 마치 도로처럼 느껴지는 선과 함께 영어 타자기로 친 듯한 글자체로 작가 이름과 제목이 인쇄되어 있다. 종이라기보다는 판이라 불러야 할 듯한 두꺼운 커버에도 역시 도로처럼 보이는 선들이 그려져 있고, 제목과 작가 이름은 커버의 오른쪽 끝에 완전히 붙어 있으며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거나 책을 오른쪽으로 돌려 보아야 똑바로 읽힌다.


커버를 열면 작가이력이 나온다. 초기작들이 나열된 글자 위에는 흑백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작가가 들으면 좋아할 소리는 아니겠지만 어쩐지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전혜린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검은색 면지를 두 장 넘기면 놀랍게도 트레이싱 페이퍼가 등장한다. 그중 첫 장에 제목이 적혀 있고, 이어지는 세 장의 종이 역시 트레이싱 페이퍼이며, 제목 바로 뒷장에는 조금 전의 그 흑백사진 속 작가의 얼굴이 이번엔 페이지를 꽉 채운 채 독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머지 두 장은 작가의 말로 채워져 있다. 일종의 에필로그로 보이는 프롤로그이다. 아주 작은 글자로 인쇄된 이 '에필로그-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감각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식이나 다른 문화적인 호사취미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혐오하는 편이다.'


2002년의 '배수아체'를 오롯이 맛볼 수 있는 이 짧은 글에는 거친 추신이 달려 있다. 그리고 추신 옆에는 '2002년 1월 Ivanna에서 배수아'라고, 예의 그 타자기 스타일의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여기엔 (레드 제플린의) <Going to California>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설은 여행에 관한 소설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와는 상관없는 여행이다. 아무도 자신의 것이 그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출간에 관여한 사람들은 왜 <이바나>가 이런 모습으로 탄생하기를 원했을까. 아니,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길 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 요즘 나는 이 책을 만든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들인지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다.


추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이바나> 속 여행에 진심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정말로 '이바나'라는 이름을 가진 대책 없이 늙은 자동차를 몰고 이름 없는 길을 꿈에서도 달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배수아 작가가 (어느 소설가의 표현처럼) 이미 '다른 트랙'으로 달리기 시작했음을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시만 해도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꼭 맞는 옷을 입고 태어나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왜 출판사들이 <이바나>를 재출간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그녀의 대표작 목록에 <이바나>가 빠져 있는지 대한 아쉬움을 가진 시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작품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재출간되고 있는 마당에, 심지어 가장 최근에는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도둑 자매>까지 무려 20여 년의 시간차가 있는 단편묶여 나오기도 했는데 말이다.



난 이 이야기에 열광할 젊은 독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바나>는 유행을 탈 수 없는 소설이며 절대 늙을 수 없는 소설이다. 특정 시기나 사회 분위기를 환기시키지 않는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 어느 페이지든 펼쳐 읽어도 시공간이 점점 상관없어지는 방향으로 진행 중인 꿈 같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아무리 읽어도 우리는 소설 속 거기가 어딘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잊히고 있다는, 아니 이미 잊힌 듯하다는 사실이 조금 외롭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더 이상 배수아를 말할 때 <이바나>를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는 한 편의 소설에서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15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받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에 관해 여전히 생각하는 중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내가 죽게 된다면 이 소설을 끌어안은 채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하나의 소설이 사람에게 이토록 중요한 감정을 일으킨다면 그것을 단지 소설이라고만 칭할 수 있는지. 오히려 이 책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온 수많은 생명들보다 더욱 생명체다운 어떤 것이 아닐는지. 거의 모든 페이지의 귀퉁이가 접힌 15년 된 나만의 <이바나>는, 이제 한 사람의 독자로서의 나 자신을 증명하는 신분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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