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 기리보이 - 호랑이 소굴
우리가 이제 몇 년 차인 거지? 카톡방에서 친구들과 이렇게 저렇게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꼽아보기 시작한 연차. 보자, 마지막으로 원티드 이력서 업데이트한 거 보니까 내가 2017년 9월부터 일을 시작했네? 18,19,20,21... 아니 벌써 5년 차라고? 실화야?
5년 차. 10년 차, 15년 차 베테랑 선배님들이 보시기에 작고 귀여운 연차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경우에, 업을 살짝 변경하면서 커리어를 쌓아오다 보니 체감하는 것보다 5년이라는 숫자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 이 업계에서 5년 차를 말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을 쌓은 건 맞는 걸까? 첫 시작은 수습이었으니까 빼자, 아직 2개월 남았으니까 이것도 빼자, 하며 억지로 4년 차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었다. 그래도 4년 차나 5년 차나. 크게 다른가 싶다.
그동안 퍼포먼스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옮긴 것도 주변의 사람, 함께 일한 파트너가 좋게 봐주신 덕분에 계속 나름대로 점프 업하며 일해왔고, 지금도 나름 긍정적인 평을 받고 있으니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도 되었다. 막상 발을 담가보니 '앗 생각보다 여기는 나의 온도와 안 맞네' 싶은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지나간 선택이 부끄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전부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어 둥글고 모호했던 나의 기준에 조금씩 선명한 윤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었다. 계속 이대로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있으면 되는지, 혹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지금부터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은 없는지.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어떤 욕망이 살고 있는지. 겸손을 핑계로 밀어 두었던 마음을 살짝쿵 들여다볼 시간 아닐까.
따사롭던 주말의 낮, 스페인을 컨셉으로 꾸며졌다는 아기자기한 합정의 한 카페에 갔다. 귀여운 언니 두 분이 스페인인 느낌 물씬 풍기는 춤을 연습하시며 수다 떠들고 계시다가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살짝 멈추고 안내해주셨다. 탱고 그림과 인조 식물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귀여운 공간이었다. 카페 이지만 와인과 맥주, 칵테일 등 몇 가지 주류 메뉴도 판매하는 곳이었다. (맞다 사실 알고 갔다) 높은 도수의 칵테일 한 잔이 주는 알딸딸함을 사랑하는 나는, 얼그레이 향이 진하게 난다는 칵테일 한 잔과 휘낭시에를 주문했다. 스페인 국기를 꽂은 귀여운 크래커에 바닐라와 무화과 잼을 곁들여 함께 내어주셨다. 음, 딱 좋은 시작이군. 아이패드를 꺼내놓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메모 앱에 끄적여보기 시작했다.
우선 나의 Goal을 생각했다. 어디선가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액션을 먼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거꾸로 플랜을 생각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하더라. 내 업을 길게 보았을 때 종내에 도착하고 싶은 곳은 어디지? 단계별로 점차 큰 회사를 가는 것인가? 아니면 막 아무 사업 아이템이나 실행해 봐? 이미 어딘가에 휘갈겨 쓴 아이템은 많고 많았다. 그중 90%는 이미 시장에 있는 것이겠지만. 막연한 생각과 상상이 구름처럼 떠돌았다. 삶의 목표는 처음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항상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지 내 마음이지만 나조차 모호하고 어렵다가 이번에는 조금 더 뚜렷해짐을 느꼈다. 역시 모든 건 타이밍이다. 내가 보는 수많은 정보들,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질투 나는 요소들... 등 많은 간접 경험과 혼자만의 사색이 모여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억지로 끌어내는 것은 일시적인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적은 가능성에도 흥분을 잘하고 금방 들뜨는 나에게는 더욱.
최종적으로 내가 낸 결론은, '프리 워커'가 되고 싶다! 였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생산성을 최대로 압축하며 돈 벌고 싶다. 낯선 곳에 노트북 들고 떠나는, 흔히 말하는 노마드의 삶이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여행지에서 일하는 것을 누구는 최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전의 얕은 경험에 의하면 낯선 장소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나는 퍽이나 좋아했다. (지금 '워케이션'이라고들 하더라) 사실 꼭 여행지나 낯선 장소가 아니어도 된다. 나에게는 내 시간과 장소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5년 동안 징그럽게 쌓아 온 인풋을 하나씩 아웃풋으로 전환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랬나,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무언가 이루어 내고픈 욕심과 욕망이 가득하다. 최근 나눈 대화에서도 '저는 지금까지의 커리어 중에서 지금 가장 퍼포먼스를 잘 내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런 환경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랬다. 그동안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기보다 '좋은 게 좋은 거, 안 좋으면 어쩔 수 없고'라는 스텐스가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하는 일들이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만들었으면, 누군가에게 더 닿았으면! 하고 욕심을 내고 있었다. 누군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거나 내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질투가 나기도 하고. 자연스럽고 건강한 질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5년 차 정도 되면 이런 목표와 마음이 생기는 건가?! 이 마음이 언제 사그라들지 모르니 꽉 잘 붙잡고 동력으로 삼아야지.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 솔직하게 인정하고 노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내게 취약한 부분이 '자기 확신'이었는데 최근 책도 읽고, 나를 테스트하는 작은 실험들을 통해 많이 나아졌다. 별 근거는 없지만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글쎄, 뭐 안된다고 해도 어떤가. 내가 여기에 적은 글을 빼면 아무도 나의 실패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진 귀하고 솔직한 마음을 무엇보다 앞세워 보기로.
/ 오늘의 플레이리스트 : 기리보이 - 호랑이 소굴
국힙은 학생 때 이후로 즐겨 듣는 장르는 아닌데, 위와 같은 마음이 있어서인지 최근에 우연히 들은 이 노래가 귀에 꽂혔다. 대담함이 느껴지는 가사와 비트가 유난히 좋은 곡. '나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라는 훅이 어쩌면 지금 나에게 큰 용기를 주는 문장 같다. 그래 현생이 호랑이 소굴이지~ 그리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아티스트 '기리보이'가 최근에 특히 달라 보이기도.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엄청난 작업량으로 꾸준히 롱런하는 멋진 사람. 인터뷰를 보면 그냥 '재밌어서 계속했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가지고 업에 임한다. 본업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좋아한다, 하고 싶다'라는 단순한 마음으로 이제는 연기까지 도전하는, 매번 차트 1위를 찍는 게 좋은 건가. 1등이 아니어도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기리보이가 더 좋다.
몇 번의 위기 위를 넘어 다녀
너무 빠른 세상에서 걸어 다녀
계속 벌어 나는 계속 벌어
몇 번 넘어져도 나의 커리어는 떳떳
또 멀어져 가네 나의 고향 서울
멍청해지지 돈을 벌면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가 문제였을까 싶어
나의 변화가 나는 멋진 놈이고 싶어
이긴 만큼 깊어져 나는 쿨하게 지고 싶어
멋있게 지고 싶어 좋은 날은 오니까 오늘 하룰 버텨
나쁜 일이라도 나는 가볼래 내가 알던 곳부터 낯선 곳도
내가 바보래도 나는 가볼래 들어가 볼게
나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
나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
나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
나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 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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