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의 끝에 출구는 모르겠고 발견은 있었다.
- 1편과 이어집니다.
뷰티 커뮤니티 플랫폼, 광고 세일즈 매니저로의 두 번째 이직. 나름 잔잔하고 평온한 항해의 중간이었다. 크게 두려워할만한 파도도, 눈앞에 보이는 방해물도 없다. 옆을 돌아보면 마음 맞는 동료들이 함께 지도를 보고 서있다. 저 멀리에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만나게 될 목적지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나는 그 항해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매기 시작했다. 묵묵히 선장의 지휘 아래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엉뚱하게도 그 지도 밖이 궁금해졌다. "이 지도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 길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 보이는 저 섬이 아닌, 다른 섬을 향해 갈 수도 있는 걸까?" 당시에는 여러 이유를 들어 저는 이만 여기서 항해를 마치겠어요.라고 했지만 그 모든 이유를 돌아보니 결국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 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1년쯤 지나니 업무가 손에 익어 같은 업무가 반복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광고 상품을 안내하는 역할까지만 담당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매일 같이 브랜드/대행사를 대상으로 미팅하며 똑같은 광고 상품을 소개한 후 뒤돌아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어떤 관점에서 우리의 광고 상품을 바라보고, 어떤 계획 안에 이용하는 걸까? 실제로 판매까지 성과가 이어지기도 할까?' 마침 광고의 효율과 성과를 측정하는 퍼포먼스/데이터 마케팅이 붐처럼 일어나는 중이었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매일같이 들으며 더 자극받게 된다. 그 세계는 분명 꿈틀거리고 있고, 형형색색 여러 가지 색이 돋아나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고 불확실하지만 더 본질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졌다. 거칠고 어려운 항해가 될 것이 뻔한데, 나는 정말 배를 갈아타고 싶은가?
조금 더 욕심이 나서 고민이 되는 것이라면,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경험들을 토대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남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
퇴사와 이직을 두고 생각이 복잡해서 괴로워했던 것이 기억난다. 주변에도 물어보고 혼자서 글로 정리도 해보면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생각했다. '지금이 나쁘지 않은데 정말 떠나는 것이 맞을까?' 오랜 성찰 끝에 결정을 하니 그 다짐은 단단해져서 오히려 모두에게 떠남의 이유를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었다. 파트장님이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축복해 주셨다. "영선님은 박수 칠 때 떠나네요."라고 말씀 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좋은 동료들의 응원 속에서 힘듦으로 가는 여정을 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에서 3번째 직업(?)을 갖게 된다. 오프라인 이벤트로 시작해 광고 세일즈 매니저, 이제 퍼포먼스 마케터로. 돌아보면 큰 맥락에서 '마케팅'에 포함되는 활동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케팅 제안서를 써본 것도 아니고 기획/전략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0부터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담당자로서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고객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던져야 했다.
깊게 고민하기도 전에 입사하자마자 실무에 필요한 스킬이 전무했던 내가 배울 것은 너무도 많았다. 1학기 문과였는데 2학기 이과로 전과하고 바로 시험 치는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국어/영어만 집중하다가 이과 수학 시험을 바로 맞닥뜨린 느낌. 평소 쓰던 뇌의 반대편을 쓰는 기분이었다. CPC, CTR, CVR... 지금은 눈 감고도 설명할 수 있는 지표지만 그 당시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매일이 도전이었다. 각 매체의 특성과 운영법을 익히면서 동시에 그로스 마케팅 분야도 다루었기에 많은 공부를 필요로 했다. 웹사이트 기반으로 성과를 내야 하기에 코딩과 같은 개발 영역을 따로 배우는 동료들도 있었다. 그래도 적응의 동물이라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여러 프로젝트에 내 던져진 덕분에(?) 새로운 일의 호흡에 서서히 적응되고 있었다.
1) 다양한 스테이지, 도메인을 경험하다.
뷰티 브랜드부터 스포츠, 패션, 아기 용품 브랜드. 대표 1인이 운영하는 브랜드부터 글로벌 브랜드까지, 대행사 특성상 2개 이상의 브랜드를 동시 담당하기도 하고 운영 기간이 길지 않아 여러 유형의 광고주를 경험했다. 산업과 고객을 매번 다시 스터디하는 것은 크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각 도메인별로 마케팅의 특징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뷰티는 '예쁨'을 강조하고 '올리브영 세일 시즌'의 파워가 자사몰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 커머스에서 단독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면 할인 경쟁이 심하다는 것. 글로벌 브랜드는 국내 실무진이 핸들링할 수 있는 의사 결정의 폭이 좁다는 것. (모든 브랜드에 일반화되는 내용은 아니다) 이런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내가 선호하는, 또는 제외하고 싶은 마케팅의 결을 파악할 수 있었다.
2) 노마드 업무 환경
첫 번째 회사에서 대행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다. 그럼에도 이 회사를 택한 것은 고전적인 구조를 벗어나 혁신을 만들어 가려는 의지가 보였기 때문. 리모트를 기반한 주 2회 1시~6시 오피스 출근 제도, 고객사와 갑을이 아닌 건강하고 평등한 협업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지금은 많이 확산된 문화이지만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이런 문화를 장착해 나갈지, 굉장히 실험적이었다. 덕분에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일상의 균형을 잡아갈 수 있었다. 제주에서, 부산에서.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노트북 하나로 일을 해내는 경험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정의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3) 성장하는 동료들과의 진한 만남
20명 단위의, 한창 주목받는 퍼포먼스/그로스 마케팅을 외치며 떠오르는 작은 회사였기에 그 속의 동료들도 평범치는 않았다. 배움과 성장의 의지를 안고 새로운 물결에 뛰어드는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 같은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뜨겁게 일도 했지만 미라클 모닝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회고 모임, 일일 팝업 식당 프로젝트 등을 함께 했다. 회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공부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사람들, 그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8개월, 나에게는 또 다른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담당하던 프로젝트의 성과를 브리핑하고 어떤 개선을 만들어 나가면 좋을지 논의하는 미팅이었다. 갑자기 한분 빼고는 모두 미팅룸을 나가시더니 담당자님이 조심스레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입사하셔서 같이 일하는 것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에는 '엇? 나를 왜??' 다른 분과 착각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재차 물어봤다. "정말 저랑요??" 마케팅 팀원의 부재도 있었거니와,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렬하고 프로세스를 만들면서 일하는 나의 업무 방식이 현재 팀에 필요하다고 하셨다.
마침 담당자분과 업무의 결도 잘 맞다고 생각하던 중에 제안을 받게 되어 무척 기뻤다. 콘텐츠 교육 서비스,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일. 커머스, 뷰티가 아닌 업종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교육 서비스는 충분히 고려해 볼 법한 옵션이었다. 더불어 퍼포먼스 마케팅에서 만드는 숫자적인 성과도 의미가 있었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개선을 할 수는 없을까? 예를 들면 서비스의 가치를 만드는 순간부터 개입할 수는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있었고. 성과를 개선해 가는 방식이 매체 운영에만 있는 것도 한계가 느껴졌다. 브랜드 관점에서 마케팅을 하면 고객과의 더 다양한 터치 포인트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렇게 감사한 제안으로 합류하여 마케팅 팀 구축부터 브랜드 메시지 및 마케팅 전략 세우기, CRM, 제휴, 인플루언서 마케팅, 심지어 70만 원 상당의 서비스 판매를 위해 리드 확보와 콜 영업까지. 프로덕트의 콘텐츠를 만들고 가격 변경, UX/UI 개편 등 다양한 프로젝트와 수많은 실행과 실패 경험을 함께 했다. 바라던 대로 비즈니스/브랜드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성과를 만들 수 있을지 제로 베이스부터 고민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1년 10개월, 회사의 방향성 변경으로 내가 속해 있던 서비스보다 더 비즈니스적인 성장이 돋보이는 서비스에 집중하게 되어 7월을 끝으로 업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광범위한 액션을 해본 것이 개인적인 경험의 측면에서는 무척 좋았지만 목표하는 성장 그래프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많이 아쉬웠다. 1차 액션에 대한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2단계, 3단계로 쌓아 올리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효율에 따라 리소스를 투입해야 하는 회사 차원에서는 우리 서비스에 많은 개발 리소스를 지원해 주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가치를 개선시키는 액션보다는 단기적인 세일즈에 집중한 액션에 집중된 것도 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만드는 프로세스를 한 번씩은 모두 경험해 보고, 내가 어떤 영역에 능한지, 또 약한지 알 수 있었다. 다음의 TO DO와 NOT TO DO를 고민할 수 있는 베이스는 만들어진 것 같다. 공감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멋진 서비스와 가치 있는 고민을 함께 했고, 이 경험은 앞으로의 하게 될 다양한 시도에도 든든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이 중 공통점을 찾아내어 묶어내면, 다음 행보에 대한 힌트가 있지 않을까?
< 공통분모 >
1. 나는 학습을 좋아하고 스스로 동기부여 하는 존재다. 그래서 시장과 고객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인풋을 필요로 하는 마케팅이 흥미롭다.
2. 쉬운 과제보다 어려운 과제를 선호한다.
3. 1순위도 사람, 2순위도 사람. 협업하는 존재와, 내가 도움을 주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일에서 중요한 파이를 차지한다.
커리어에서 넥스트를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는데, 정리하면서 보니까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영선아, 수고했어.라는 말을 진심으로 해주고 싶다. 일에서 번아웃을 느끼거나 관계에 힘듦을 느끼는 편은 아니어서 그 과정이 괴롭지만은 않았는데, 새삼 돌아보니 정말 애썼구나, 싶다.
덕분에 회사라는 타이틀을 이제 빼고도 용돈 정도는 벌 수 있는 생존 기술도 생겼다. 이제 이 모든 경험의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어떤 돌 위에 더 돌을 쌓아 탑을 만들지 차근차근 생각하면 된다. 당장은 나에게 시간 낭비와 정체라는 선물을 주면 어떨까, 이 모든 여정을 거치면서 가진 생각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있고 많이 달라진 생각들도 있다. 확실한 건 예전만큼 더 많이 배울래, 성장할래, 그 속도가 가파르지는 않다. 자극적이고 큰 성장의 맛보다 건강한 우량주처럼 오래오래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싶다. 본격 퇴사까지 남은 1달의 시간, 이 시간 동안 나는 또 어떤 다음을 그려가게 될까? 그 생각은 그때 그때 마다 이 매거진에 남겨둘 생각이다. 당장은 그냥 흐르는 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 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붓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 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퇴사하고 뭐 할까? 매거진은 스타트업, 마케팅 에이전시 등을 거친 6년 차 마케터 '영선'이 처음으로 갭모먼트를 가지며 하게 되는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는 시리즈입니다. 요즘 같은 대퇴사의 시대에 저의 갭모먼트는 남들과 같을까요? 혹은 나만의 풍경을 그려가게 될까요? 일기처럼 하루에 1개씩 쓰는 것이 목표랍니다. 궁금하시다면 구독하고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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