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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22. 2022

#02 2013년 그날, 대만 입국기

다사다난 그 자체

그날은 도쿄 스카이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 안 될 만큼 흐린 날씨였고 그저 '내가 운이 없어서 못 봤구나' 하고 무심코 지나쳤었다. 평소에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없었고 내가 가는 곳이 동남아 아열대 기후에 속해 있다는 것조차 인지 못할 만큼 무신경했던 나는 드디어 대만으로 간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해있었다.


그 전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나 반가웠고, 나도 이제 경험해야 할 타지 생활의 선배(?)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고, 하룻밤을 보내게 해 준 고마움도 있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 마음으로 그 친구를 위한 저녁을 샀다.


치바 계화루


J는 대학교 룸메로 일본어과였는데 우리나라 신화처럼 일본 국민 아이돌 「아라시」라는 그룹에 푹 빠져있었다. 덕분에 매일 그들의 영상을 보게 됐고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룸메 2명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분들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치바 계화루는 아라시 멤버 중 한 명인 아이바 부모님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다. J도 워홀로 그 중화요리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기 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저녁식사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대학교 시절 이야기, 워홀 이야기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계속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내가 환전해간 돈을 동전만 제외하고 모조리 저녁식사로 써버리게 되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친구의 마음을 한사코 뿌리치고 입씨름을 벌이다 우리는 결국 중간 지점에서 헤어지자고 합의를 보았는데 만약 J가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하철에서 미아가 될 뻔했다. 일본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많이 들어는 봤었지만 공항까지의 지하철 비용이 그렇게나 비싼 줄 몰랐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친구가 지하철 비용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지하철이 어찌나 복잡하던지 혼자 갔더라면 환승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 못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를 탄 후 이제 고난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포공항에서 출발할 때 이미 비행기를 못 탈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포공항에서 티켓 수속을 하려는 데 항공사 직원분이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내 비자를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하나의 징크스가 있는데 한마디로 재수가 없..  뭐든 나는 예외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치아를 하나 뽑아도 응급실 갈 일이 생기니 이젠 문제가 생기면 '아... 역시 이번에도 그냥 안 넘어가는구나' 체념하는 식이었다. 이번에도 설마 아예 출국이 안 되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직원분이 심지어 책임자로 보이는 상사 직원과 긴 토론 끝에 말하길 내 비자는 워킹비자인데 워킹홀리데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Visitor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출국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일본 입국과 대만 입국 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입국이 거부될 시 항공사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시켜 준 후에서야 나는 출국을 할 수 있었다.



이런데도 굳이 꼭 일본을 들렸다가 가야 하냐고 언니한테 한소리 핀잔까지 들었으니 비행기를 타는 내내 정말이지 불안해서 기내식도 맘 편히 먹지 못했다.


결론은(다행히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알고 보니 일본 워킹비자는 워킹홀리데이라고 정확히 명시되어있고 기간도 1년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대만 비자와는 형식이 조금 다른 것뿐이지 일본을 갔다가 대만을 도착할 때까지 내 비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름 이미 액땜을 했다며 대만에 도착할 때 까지는 이제 별일 없을 거라고 안심했는데 역시나 대만 입국도 순탄치 않았다...


무려 태풍과 대만을 같이 갔기 때문이다.


대만 타이페이 근처에는 공항이 2개가 있는데 타이페이 도심 안에 있는 송산공항(우리나라 김포공항과 비슷) 타오위안 공항(우리나라 인천공항과 비슷)이다. 일부러 편의를 위해 송산공항(타오위안 공항 도착보다 비싸다)으로 티켓을 끊었는데 착륙 5분 전에 송산공항에 착륙이 어렵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장장 2시간 동안 송산공항-타오위안 공항을 왔다 갔다 하는 가 싶더니만 송산공항에 도착하지 못하고 결국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착륙하게 되었다.


타오위안(桃園) 국제공항


2시간 동안 차멀미도 아니고 뱃멀미도 아니고 비행기 멀미를 하는데 그때의 그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든 모공에서 식은땀이 나오는 느낌인데 그 식은땀이 일반적인 땀이 아니라 마치 모공에서 탄산수처럼 솨~한 땀이 나오는 느낌이었다. 열도 나고 속은 거북했지만 비행기에서 절대 토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그렇게 경험 경험 노래를 부르더니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싶었다.  


내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송산공항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곳이었는데 타오위안 공항에서 내리는 바람에 공항버스를 40분 정도를 타고 다시 송산공항으로 가서 송산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가야 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마냥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데 짐은 많고 우산은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정말 울고 싶었다. 공항은 너무 컸고 공항버스 안내표지판도 제대로 못 찾고 한참을 헤맸다. 게스트하우스 매니저분과 약속한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인터넷도 제대로 안되고 이제 대만에서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작은 눈은 뜨기도 힘들고 눈꼬리와 입꼬리가 점점 쳐져만 갔다.


대우가 만든 대만 버스


겨우 공항버스를 찾아 타고 우울한 마음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버스에 「대우」 라고 적혀있는 게 아닌가.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순간 이렇게 반갑고 뿌듯할 수가 없다. 연고 없는 이곳에 그래도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기분이랄까. 다시 용기가 생기면서 '그래, 별 일 아니야. 괜찮아. 대만에서 정말 잘 살아보자'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해도 되나 싶...


같은 비행기(with태풍)를 탔던 일본인 아저씨 2명도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 옆에서 들어보니 나처럼 종점인 송산공항에 내려야 하는데 갑자기 중간에서 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이 비행기에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 동지 같은 사람들인데 마침 우울했던 마음도 풀어진 터라 오지랖이 발동이 되었다.  


여기서 내리시면 안 돼요. 송산공항은 15분은 더 가야 한다고 하네요.
조금 기다렸다가 저랑 같이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분들이 내 일본어 발음이 일본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대만 사람도 아닌 거 같다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셨다. 한국 사람이고 일본 드라마, 예능을 많이 봐서 일본어를 조금 할 수 있다고 알려주니 엄청 고마워하시며 친절하게 내 대만에서의 생활도 응원해주셨다.


허허, 외국에서 한국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마무리였다!라는 느낌으로 드디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나를 4시간이나 기다린 탓에 씩씩 거리긴 하셨지만(티를 팍팍 내시는 아주 솔직한 분ㅋㅋㅋ) 착한 일을 해서인지 매니저님이 다행히 좋은 분이었고 막 도착한 나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 바로 한국 친구와 대만 친구를 소개해주셨다.


타이페이에 있던 한국 카페


매니저님이 데려가 준 카페는 타이페이 중심부에 있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한국 노래도 계속 나오고 한국어가 적혀있는 인테리어를 보니 내가 지금 대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태풍에 비도 많이 와서 꽤 추웠는데 카페에 들어가고 나니 너무 포근했다.


영화를 보면 꼭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고난을 겪다가 겨우 가족들이 있는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들보들한 카펫이 깔린 거실이 보이고 코지한 인테리어의  거실에서 누군가 모닥불을 지핀다. 그리고 담요를 덮고 바닥에 앉아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코코아  잔으로 지칠 때로 지친 마음과 몸을 녹이는 장면

그날 긴 여정 끝에 내가 카페에서 느낀 아늑한 기분이 딱 그 기분이었다.

비록 내가 주문한 건 오미자차였지만...


1년 동안의 대만 워킹홀리데이는 예상외의 수확들도 많았지만 처음에 정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내 실패담을 보고 교훈을 삼는 사람도 있으면 좋겠고 정보를 얻어 활용하는 사람도 있길 바란다.


목적 달성에는 실패였다 할지라도  경험을 통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워홀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역시나 실패한 워킹홀리데이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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