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성장: 사람은 언제 왜 변하는가?
등장인물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인물이 악행을 그만두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주관적인 질문이지만, 나는 가장 설득력 있는 구원의 과정은 어느 정도 문학적 대칭을 사용함을 발견했다. 즉 이야기 전반에 걸쳐, 등장인물은 과거에 자신이 한 악행이나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상쇄할 수 있는 행동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 결과 일종의 시적 정의가 실현된다.
‘구원은 곧 죽음’이라는 장치는 또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전제한다. 그런 희생이 고결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살아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직 죽어본 적이 없는 관객에게는 더 의미 있고 더 공감할 수 있는 보상 방식일 것이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는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수년간 해리를 보호하면서 자신의 죄를 갚아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여기에는 해리의 목숨을 서너 차례 구한 것과 덤블도어를 죽임으로써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것을 감당하면서 볼드모트를 패배시켜야 하는 해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모든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결말에서 스네이프는 죽음을 맞이한다.
스네이프에게 구원은 오직 해리와 해리의 엄마 릴리의 눈에 달려 있었다. 스네이프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리를 괴롭혔지만 그의 죽음은 인물호에서 여전히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스네이프의 죽음은 구원받는 인물에 대한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인물호라는 길고 복잡하고 매혹적인 문장에 완전한 마침표를 찍는다.
어떤 인물이 개과천선했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반드시 그 사실을 믿거나 그 인물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관계를 회복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복잡한 작업이며, 대다수 인물은 인물호의 주체가 겪는 심리 변화를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인물의 과거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물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용서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 원래 상태로 복구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하며, 이야기에는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인물의 자리도 존재한다. 어떤 인물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 가해자를 너무 쉽게 용서한다면 작가가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폄훼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
다. 독자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와 ‘구원받은’ 인물의 관계에 그런 상처와 고통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