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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Oct 01. 2022

마흔, 시작하기 좋은 나이

책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리뷰



알리고자 하는 욕구는

더 잘 알고자 하는 욕구로 

다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그들이 사는 세상의 

우주적 비밀을 계속해서 

파헤쳐갈 것이다. 

글쓰기는 계속된다.


[양혜원 에세이,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중에서]





소설가 고 박완서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에세이를 한 권 사두었지만 지금과 다른 문체에 책을 몇 번 열었다가 덮으며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건, 마흔. 시작. 글쓰기. 에세이라는 키워드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그만의 소설 세계는 잘 몰랐다. 예스 24 온라인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책을 보고 궁금증이 일어났다. 동시에 이 에세이는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동양철학과 명리학을 공부한 분에게 사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에게는 이제 초록색이 잘 맞을 것이라 말했다. 톤 다운된 민트색의 이 책의 표지색이 지금 나와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먼저 이 책은 박완서 소설가의 책이 아니다. 박완서의 삶과 박완서의 소설 세계, 전후 한국시대와 지금 여성의 삶에 대해 탐구하고 연구한 양혜원 작가의 에세이이다.





이 책은 '내가 읽은 박완서'쯤의 글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작품에서 작가를 보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도 보려 했다.

-프롤로그 중에서



에세이는 박완서의 작품과 그녀의 삶을 번갈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가인 양혜원 님 본인의 경험을 함께 전한다. 책 서두에서, 저자 본인의 생각과 경험은 혹시라도 박완서 소설가의 삶이 너무도 멀게 느껴질 독자들을 연결해줄 다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박완서와 그 시대의 삶을 잘 모르던 내가 느끼기에도 "이어주는 다리"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여성의 시각으로 쓰였고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며 박완서가 살았고 썼던 시대, 그 시절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지금은 당연하지 않지만 그때는 당연했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꼭 페미니즘 관점에서 꺼내는 이야기가 아닌 것 역시도 밝히고 있음은 물론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억압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신을 포기하지 않는 반면, 문학은 정해진 의미 혹은 실체가 있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가능한 한 그 중간을 걸으려 하는데, 여성 억압의 현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인간사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텍스트의 의미의 경우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최종 발언(final say)은 저자가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 양혜원 에세이






스무 살 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다가, 마흔 살에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 박완서. 하루아침에 엄마, 부녀자, 집 안의 여성에서 작가라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남편과 박완서 사이의 이야기는, 그녀의 딸로부터 들을 수 있는데 매일 남편의 저녁을 차리며 '왕처럼' 대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양혜원은 이를 '아이처럼' 대하며 남편의 질투를 달래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일, 글쓰기를 이어갔다고 해석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일종의 등대 같은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소설보다는, 박완서라는 작가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전업주부로 살다가 마흔에 등단한 여성 작가였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온전히 살림에만 전념하는 주부로 살다가 마흔에 홀연히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결혼하고 아이 키우면서 이렇다 하게 개인적으로 이룬 게 없는 듯한 여성들에게 희망이 된다.

책 속에서.

지금은 엄마여도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더 당연해졌다. 그러한 모습은 박완서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서 이미 표현이 되고 있었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그의 아량에 기대어 살기보다 나가서 직접 내 손으로 돈을 벌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던, '똑똑한 여자'들의 세대.

책 속에서.



박완서가 그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있다. 어릴 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빠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어머니의 의지가 책 속에서 비친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박완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책 전반 여성으로서의 삶과 그녀의 사고관, 시각에 대해 말한다면 중후반부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트라우마와 고통,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전쟁 그리고 그때 경험한 오빠의 상실, 그 이후 이어진 가족의 삶. 그 이야기가 담긴 자전적 소설이 가장 유명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였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결심하며 끝난다고 한다. 트라우마와 생존, 증언의 욕구, 또 생존하기 위한 증언. '고통에서 삶의 치유로'라는 이 책의 부제를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남편과 아들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겪게 되고, 감정적 독립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 이미 소설가로 자리한 이후였음에도, 독립과정의 필요성에 대해 느꼈다고.


이 감정적 독립이 오직 경제적 자유만을 지향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내 또래 3040에게 상징하는 바가 컸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이 오직 경제적 자유 그것 만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있었던 내게 감정적 독립은 낯설지만 날카롭게 와닿았다. 직장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생각과 삶을 전환하고자 애쓰는 내게 감정적 독립은 경제적 안정에 이은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였다.


그녀가 남편과 아들이라는 든든한 테두리의 존재를 그들을 잃고 나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나 역시도, 내게 있었을 때는 당연한 나의 삶이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존재하고 있었던 안정적인 틀과 테두리가 있었겠구나. 생각해보았다.


그 틀이 사라졌을 때 느껴지는 상실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것 마저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후반부는 내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졌다. 중년에 달하여 가까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삶을 생산적으로 만든다는 양혜원 작가의 해석이 인상 깊었다. 나는 만 나이로 바꾸면 아직은 30대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도 중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용기를 용기를 주는 문장이기도 했다. 





중년의 죽음 준비에 생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과제일 것이다. 




청년을 벗어나 중년과 장년 그 어디쯤인가에서 왠지 모르게 내 삶에 헛헛함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나처럼 박완서 작가의 삶과 소설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도 충분히 빠져들어서 읽을 수 있도록 지금 시대와 잘 연결해주었다. 


책을 덮으며 마흔이라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참 좋은 나이를 지나고 있음에 잠시나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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