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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Sep 29. 2022

소설 데미안으로 돌아본 직장인의 삶

나로 살아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나를 발견하는 여정.


#소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소년 싱클레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나를 발견하는 이야기




스스로 질문을 품기 시작하는 자,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준비를 시작하다.



소설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전학생 데미안을 만나 자아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소설로 회자되곤 한다. 나도 이전에 같은 생각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당연한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해 마음속으로 질문을 품기 시작한다. 늘 단정하고 깨끗하며 종교와 함께하는 부모님의 밝은 세계, 주정뱅이, 방랑자, 욕이 뒤섞여 있는 싱클레어의 집 하녀들의 어두운 세계. 두 세계는 같은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지만 마치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싱클레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열 살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의 등장은 강렬하였고 데미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시작은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라는 생각을 했다.  소년 싱클레어의 두 세계에 대한 인식과 질문이 있었다.



나는 그 밝고 고요한 세계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내 구두에 더러움을 묻혀왔다. 발 깔개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운 발. 나는 우리 집의 세계에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몰고 왔다.
-중략-

그러다 보니 새롭고 묘한 감정이 마음속에 불꽃처럼 튀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날이 선 듯한 반항심이었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젖은 신발만 꾸짖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추악하고도 적대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강하고 깊은 매력이 있었고, 이 느낌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나를 내 비밀과 죄에 결박시켰다
-중략-

지금까지의 모든 체험 중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내가 새긴 최초의 칼자국이었고, 내 유년 시절을 이루는 기둥에 가한 최초의 칼질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가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기둥이었다.

소설 데미안 / 챕터 두 세계



데미안은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데미안도 그의 어머니에게 싱클레어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이마에 표적이 있는 애가 있어요. 그는 틀림없이 내 친구가 될 거예요."라고.

이는 소설 앞부분에 나오진 않지만, 싱클레어가 훗날 성인이 되어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로부터 들으면서 소설 후반부에 드러난다.



우리도 어린 싱클레어처럼 내 삶의 당연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질문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데미안을 만날 수 있다.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옳은 것, 정해진 생각의 틀
관습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괴롭히고 속박하던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그를 구출해 준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들려준다. 죄를 지어 이마에 표식을 받은 카인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생각하는 법을 알려준다. 죄와 표식, 두려움에 관한 데미안의 이야기는 책 속 진실과 선생님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싱클레어의 잔잔하던 마음에 돌을 던진 것과 같았다. 그 일렁임과 파도는 오래도록 싱클레어를 흔든다.



데미안의 말.

죄인 카인에게 남겨진 이마의 표적의 의미.


카인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죄를 지어 표적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표적이 있는 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니까. 두려움 없는 강한 족속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매우 견디기 힘들었겠지. 사람들은 그래서 강한 족속들을 위험에 빠뜨릴 음모를 꾸민 거야. 자신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에 대한 반감으로 주홍 글씨 같은 낙인과 소문을 만들어서 퍼뜨린거지.

소설 데미안 / 챕터 카인



어느 것이 진실인 이야기이냐,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면 되니 안되니-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다만 모두에게 당연하게 통용되는 진실이 진리인가, 관습에 불과한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이런 생각들이 가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주식투자는 곧 집안 가산을 탕진하는 나쁜 짓이었다. 비트코인 암호화폐 투자는 실체 없는 도박판에 돈을 거는 것과도 같은 투기행위였다. 이 믿음들은 백 퍼센트 진실과 거짓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법 오래 진실이라고 믿어왔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다른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처럼, 나도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말, 그리고 책 속에 남겨진 문장들을 통해 내가 아는 것,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다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아가는 중에 있다.


헤세가 마흔이 넘어 이런 소년기 성장 소설을 썼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설명을 보았다. 마흔이 된 나는 오히려 헤세가 마흔이 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잘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공인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
공인된 것과 금지된 것.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



싱클레어는 점차 생각이 깊어가고 두 세계를 인지하고 있지만 혼란을 느낀다. 데미안은 그의 말을 듣고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생각이 지나쳐 말이 많아지는 것에는 분명하게 주의를 준다.



넌 살인을 한다거나 소녀를 강간해서는 안돼. 그건 분명히 해서는 안 될 일이야. 너는 아직도 '공인된 것'과 '금지된 것'이라고 불리는 것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경지까지는 가지 못했어. 그저 진리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탐지한 것뿐이야. 다른 부분들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자신을 믿고 맡겨 보면 돼.

일 년 전부터 네 속에서 어떤 충동이 있었을 텐데, 다른 모든 충동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 우리들과는 다르게 그리스 사람이나 다른 민족들은 이런 충동을 신성하게 여겨서 굉장한 축제를 벌이고 그것을 기념했어.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게 아니야.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다른 민족은 우리와 또 달라. 옛날이 아닌 지금도 다르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들은 공인된 것과 금지된 것을 각자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만 해.

소설 데미안 /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생각해 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도 8시 정시 출근을 해야 했다. 8시 1분, 2분에 아이디카드를 찍고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은 금지된 행위였다. 지각 명단이 주기적으로 돌았고 지각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중엔 사유서 대신 지각을 한 날에는 1분이건 2분이건 오전 반차를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유연근무제가 적용된 지금은 통상적으로 9시 전후로는 대체로 출근을 하지만, 나처럼 10시를 넘겨서 온다고 공식적으로 질책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도 어느 회사에서는 1분 지각을 사유로 팀장이 팀원을 질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장인들은 내가 다니지 않는 직장의 모습,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많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러 회사를 두루 경험해 본 사람이 생각만큼 많지 않을 테니 우리는 굉장히 좁게 직장생활을 해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청춘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임을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밝음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음을 이미 알았지만 그는 여전히 기독교 부모님 아래에서 종교와 교리가 강조되는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그 시대에는 싱클레어처럼 부유한 부류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삶이었을 것이다. 밝음과 어두움, 금욕과 쾌락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도 힘든데 장래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진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고자 했던 싱클레어는 길게 질문을 품고 방황을 한다.



이듬해 봄,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진학을 해야 했다. 아직도 나는 어디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정하지 못했다. 내 입술 위로는 콧수염이 자라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으며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나의 내면의 소리, 즉 꿈속의 영상뿐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내면에 숨겨진 목표를 끄집어내서 내 앞에 확실히 내놓는 일이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그 와중 내가 어떤 일을 할지 찾아가기까지 해야 하다니!


직장인들은 대체로 바쁘다. 일이 많아서 바쁘고, 마감 기한이 있어서 바쁘고, 경쟁을 통한 성과를 만들어야 해서 또 바쁘다. 윗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히 이어가면서 후배들과 커뮤니케이션도 해야 한다. 어디서나 조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일과 관계, 성과. 경력과 커리어.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치여가며 바쁘게 산다.


어른인 나 역시도 그래서 뭐가 하고 싶은 건가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 바쁘게 사는 것 못지않게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을 하며 나를 돌아봐야만 하는 이유이다. 가까운 곳에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시선과 질타를 받더라도 직장인이 질문을 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틀을 깨지 않고 나올 수 없다. 껍질을 깨지 않고 태어나는 새는 없다. 나를 둘러싼 껍질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대학에 가야 했으니 갔고 전공 공부를 해야 하니 했다. 취업을 하고 일을 계속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인가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어릴 적 꿈이라 하여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릴 적 유년기 가진 꿈과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살기 위해 나는 어떤 껍질을 깨야만 하는가- 그걸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했다.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이 뚜렷하고 긴 시간 그것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커다란 힌트, 표지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 표지들을 계속해서 못 본 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개인적인 궁금증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소설 속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이렇게 묘사하곤 한다. 소년의 얼굴이면서 어른의 얼굴이며 남자이면서 여자의 얼굴이기도 하다. 어린 얼굴이지만 시간을 초월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며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저 잘 생겨서 마음에 들었던 것일 수도, 거슬렸던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어떻게 느꼈을까.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연약함과 동시에 내적 강인함을 느꼈을까.

헤세가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소설에서 데미안의 감정이나 마음은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헤세, 싱클레어가 바라본 그대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읽는 것은 가능한 것 같지만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싱클레어의 데미안처럼 그렇게 매혹적인 존재일지 모른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작가든지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하겠지만, 내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나 있을 법한 혹은 이상적인 인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기 힘든 그런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살고 있는, 실제로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이야기다.
-중략-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자, 좁고 긴 길이다. 지금껏 누구도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그 길의 끝까지 가려고 애쓴다. 어두워서 더듬거리며 걷는 이도 있고, 환한 길을 성큼성큼 가는 이도 있고, 저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중략-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협곡, 저 깊은 심연에서 내던져진 주사위들이어도, 저마다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는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소설 데미안 서문 중에서 -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과 말을 읽고 듣는 일은 편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 내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가 소설 데미안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이다.


질문을 품고 당연한 내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보자.

내게 지금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흔들림 없이 한 곳을 바라보는 단단한 눈동자를 지니게 될 테니.

                    






"당신은 이 소원을 바라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올바르게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 소원을 이루려고

마음속에 완전한 확신이 들도록 소망할 수 있다면 그땐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될거에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소원하면서도

다시 후회하기도 하고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해요."


- 소설 데미안 속 에바부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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