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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Dec 08. 2022

내가 읽는 책이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읽기와 쓰기에 관한 문장





한 서평 플랫폼에서 서평 신청 안내를 띄우며 공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출판사에서도 블로그보다 인스타 리뷰를 더 선호..." 인스타그램의 책 계정이 많아졌다는 것을 그 문장으로 문득 체감할 수 있었다. 나도 가끔씩 인스타에서 타인이 올리는 북스타그램을 들여다본다. 책 내용이 궁금해서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내 계정이 책, 글쓰기 계정이라는 것을 알고리즘에 알려주기 위한 데이터 축적이 목적일 때가 많다. 


반복적으로 누적된 예쁜 책 표지 사진들, 그리고 아주 짧은 감상 소감. 그러한 피드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 때가 많았기에 큰 감흥 없이 두 번 탭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았다. 생각해 보니 인스타 알고리즘도 콘텐츠 체류시간을 섬세하게 체크할 텐데(좋아요를 눌렀는지, 다음 사진을 보기 위해 넘겼는지, 한참 머무르며 사진을 바라보았는지, 사진이 뜨자마자 넘어가버렸는지...), 내가 책 계정에 아주 빠르게 반복적으로 좋아요를 누르지만 반짝이는 것들이나 옷을 파는 쇼핑몰 광고가 떴을 때 보다 진심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북스타그램에 내가 읽는 책을 계속해서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읽은 책의 기록을 위한 목적이 첫 번째일 것이고, 서평단이나 제휴 협찬 등을 생각한 팔로워 늘리기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타인의 별 의미 없는 기록의 축적 과정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부터도 잘못된 접근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의미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을.

이 무자비함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사람은 자기 내면에 의미를 세워 자연을 해석해야만 한다.

그간 그가 읽은 시와 소설들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쓰기 시작한 글들은 모두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현이 평생 몰두해온 일이었다.

- 소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단편소설집 中




내가 읽은 한 권의 책, 소설로는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두권 세권 네 권일 때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은 책이 쌓이고 함께 내 생각이 쌓이면 모호하던 나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재테크와 투자책을 반복적으로 읽는 직장인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경제공부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 있는 책 읽기 기록을 남기려면 베스트셀러 위주, 남들이 추천하는 유명한 책 위주로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을 먼저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읽고 모두가 좋아하기에 더 끌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기록이 남는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찾아가는 것이 더 모호해 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도 내가 모두가 읽는 책을 ‘집어 들고 재미있었다. 지루했다. 시작은 좋았지만 결말이 흐지부지했다’는 단편적인 감상만 남기는 일만 반복하며 "남들 눈에 있어 보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고자 애쓰지 않아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어제 이 글을 블로그에 먼저 발행을 했는데 내가 아는 사람 중 한 손에 꼽는 다독가이자 독서가인 친구가 댓글로 이런 이야기를 보태주었다.


"읽은 책 전부를 기록할수는 없기 때문에 공개된 기록에서는 누군가의 “일부만 볼 수 있다” 라고 말할래요."



아하! 내가 읽은 것과 기록으로 온라인에 옮긴 것은 항상 일치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타인의 언어로 다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온라인 기록이라는 필터를 한번 거쳐 내가 읽은 책을 남김으로써, 내가 보여주고 싶은 단면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고 때로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나 라는 사람의 한 단면에 하이라이트가 켜질 수도 있다. 그 모습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가진 다양한 면모를 고르게 담을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부쩍 더 사람들이 개인을 드러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진다. 앞으로도 직장, 학교, 소속과 같은 집단 속의 나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더 와닿기도 한다. 내가 속한 집단 역시도 과거의 경직된 형태에서 느슨하고 다양한 연결고리로 확대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저 태어났다가 시간이 흐르며 소멸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계속해서 나만의 이야기로 나를 표현하고 입증하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소설집에 실린 두번째 단편 소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소설 속에서 의미없는 것들의 무자비함,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 밖에 없는 자연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연은 그저 자연으로 존재할 뿐인데 무자비하다는 한 소설가 김연수의 해석과 관점이 신선했다. 그 역시도 지독하게 의미있게 존재하고자 하는 한 사람, 인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기에. 역사학자 유발하라리가 전한 것처럼,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의미없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유전자가 아주 오래 전부터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끝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러 한다.

- 책 호모데우스, 유발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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