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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락울 Oct 25. 2019

법복을 샀습니다.

단조로운 선택지의 즐거움

제 인생 바지는 원x플레이스에서 산, 무릎이 보이는 찢어진 청바지입니다. 밑위가 길어 배바지라 편하고 중청이라 여기저기 다 받쳐 입을 수 있는 효자템입니다. 


그리고 그걸 본 상사의 한마디.


"꼬매 입고 다녀라 xx아~"


옷차림은 터치하지 않는 게 원칙인 회사였는데 바뀐 상사의 원칙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 날 바로 법복을 주문했습니다. 스님들이 입는 시꺼먼 법복은 신체부위 하나 보이지 않는 옷이죠. 작년부터 법복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호기심 반, 반항심 반으로 주문한 법복이 한 달 만에 도착했습니다.


입는 순간 상사에게 감사해졌습니다. 젠장. 이렇게 편하고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 샀을 텐데. 지금이라도 이걸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비꼴 의도 1도 없이 진심으로 감사하더군요. 






처음 법복을 접하게 된 건 탈코르셋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들끓고난 후 여성에게 당연시됐던 것들을 버리자는 탈코르셋 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됐죠. 긴 머리카락부터 여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색조 화장품이나 사탕껍질 같은 옷까지 말입니다.


사실 무엇보다 구미가 당긴 건 '편하다!'는 후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절약할 수 있고 고민도 덜 수 있다니 안 할 이유가 있나요?


허리까지 오는 긴 금발 머리카락은 싹둑 잘라 턱선에 맞췄습니다. 절약을 우선시하는 인간인지라 미용실의 도움이 자주 필요한 숏컷보다는 짧은 단발을 선택했어요. 머리를 감기도 말리기도 수월했습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얘기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무모한 도전으로 이것저것 색조를 사 모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지만 나에게 잘 맞는 색조는 몇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색, 검은색 섀도우 두 개와 말린 장밋빛 립스틱 한 개만 남겨두고 모두 버릴 수 있었어요. 갈색, 검은색 섀도우로는 눈썹부터 눈두덩이 심지어 셰딩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주말에 놀러갈 때나 하는 의식입니다. 파우치도 피부도 한결 가볍습니다.


만렙까지 달성하면 좋으련만 시작이 반이라고 저는 천천히 진행 중입니다. 탈코르셋 운동을 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 눈엔 하수라 탈코르셋 운동 중이라기보다는 이용 중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좋은 변화들이었어요. 삶에서 무게를 덜어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포기하지 못한 건 옷이었습니다. 준비 시간 중 시간을 잡아먹는 건 옷 고르는 일뿐이었어요. 그때 법복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도 늘 같은 옷을 입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특히 마크 저커버그는 옷을 고르는 일에 쏟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거기에 상사의 말 한마디, 적시타까지!


결국 법복을 구매했습니다. 170이 넘는 제 키에 맞게 검은색 대자로 주문했어요. 방탄소년단 정국이 입어 핫해진 탓일까요. 배송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지만 받자마자 눈물이 날 뻔했다지요. 너무 가볍고 너무 편하고 너무 좋아서요! 품이 넉넉해서 안에 뭘 껴입기도 좋았습니다.


출근 준비 시간이 더 줄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거나 컴퓨터를 만지다 밥을 먹고 씻고 선크림을 바른 후 법복을 입습니다. 걸어서 회사로 오면 아주 여유로워요. 출근까지 남은 시간에 글도 쓰고 책도 읽습니다.


단조로운 선택지가 이렇게 즐겁습니다. 






예쁜 옷을 사도 회사엔 입고 가기 싫고 비싼 가방을 사도 회사엔 매고 가기 싫다지요?


회사에서 요구하는 드레스코드가 없다면 법복을 강추드립니다. 저는 이제 겨울용 법복을 살펴보고 있어요. 봄가을용보다 가격이 꽤 나가네요. 그래도 하나 들이면 겨울 내내 롱패딩과 함께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군요.


이렇게 하나하나 자신을 얽매는 것들을 내려놓고 선택지를 줄여보세요. 남은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날 즐겁게 해주는 일로 채워보세요. 단조로워진 일상은 복잡하지 않고 풍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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