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국 26개 도시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낭만적인 일들이 일어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만 같던 상상의 도시는, 오히려 상상과 빗나감에 더 아름다운 도시였다.
차가운 철제의 에펠탑만큼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리고 정말 '매력' 있는 도시 파리.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예술이 꽃피운 도시에 더욱 가깝게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아마 상처 입었을 것이다. 간절하게 바라고, 꿈꾸었던 세상이 짓밟힌 듯 크게 상처 입었을 것이다.
한번 상처 입은 그녀는 그 '감정'에 굴복하기보단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르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대상에게 믿음이나 사랑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되려 편안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매어있던 것을 끊고 진실을 알게되었으므로.
그녀의 죽음은 '매어져있던것으로부터의 죽음'. 그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 최종결론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은 내가 그림으로 창조한 환상들이다. 그 나머지는 흐르는 모래와 같다.
-들라크루아-
낭만주의가 나은 회화적 장르가 바로 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감성적으로 표현한 '풍경화'라는 장르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반적인 장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고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예술도, 인간도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며,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파리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정신과 열정, 내면적 힘을 감성적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자유를 위해 전투하는 여성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로 '자유'를 표현하였다.
즉, 논리적이거나 현실적이진 않지만, 당시 프랑스 시민들의 절절했던 정치참여 욕구와 분노, 열망과 끈기를 낭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경건한 모습에서는 조금 벗어난 이 그림으로부터 더욱 예수님의 특별함을 볼 수 있다. 음주가무를 즐기며 풀어져 있는 사람들 속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 있다는 듯, 예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이기도 하다.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실제 모습과 행동 그대로 대관식을 표현하기에는 사회적으로 파장이 있을 것 같고,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싫었을 것이다.
결국 대관식 장면을 황제가 아내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바꾸었고, 교황은 아무런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쪽으로 그려내었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의 인간의 이성과 합리로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사람들의 감정과 호소에 집중해 보게 되는 그림이다.
이러한 인간의 내면, 열정, 정신적 강렬함과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감상적인 접근의 '낭만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