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운수 좋은 날


국어시간, 한글 공부를 한다. 아이들이 작은 입으로 글을 읽는다. 기특하다. 신이 난다. 마침내 나는 일타 강사가 된 듯한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낀다. 하!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 엉기적엉기적 한 어린이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걷는 모양새가 아니다. 자세를 낮추고 다리를 최대한 벌려 걷는 폼이 꼭 ‘한반도의 공룡’에 나오는 점박이다.

“선생님, 저 똥...”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쉿’이라고 말해주고 어린이를 내 쪽으로 빠르게 당겼다. (인간의 본능으로는 그 아이를 멀리 보내야 하지만, 교사의 본능으로는 무조건 내 옆에 붙여야 한다.)


“얘들아, 이번엔 국어 활동 글쓰기를 한번 해볼까?”

아이들의 관심을 받지 않고 시간을 끌어야 하기에 일단 쓸 거리가 많은 국어 활동책을 동원했다. 원래 국어 활동 책을 귀찮게(?) 여기던 교사였는데 오늘따라 국어 활동이 정말 고맙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국어 활동 책 글씨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예준이와 나는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비밀 대화를 나눈다.


“예준아, 진짜 똥 쌌어?”

“네.”

“많이 쌌어?”

“아니 조금요.”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네.”

맞벌이 가정이라서 혹시 어머니께서 전화를 안 받으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어머니, 예준이가 대변 실수를 했어요. 혹시 지금 집으로 바로 보내도 될까요?”

“네, 선생님. 지금 집에 할머니 계시니까 바로 보내주세요.”

할머니께서 집에 계시다니 더욱 좋다. 휴, 다행이다. 화장실에서 임시 조치를 마친 뒤 예준이를 바로 집으로 보냈다.


국어 활동을 마친 뒤 아이쿠 영상을 다 본 학생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없어진 예준이를 찾기 시작했다.

“선생님 예준이 어디 갔어요?”

“집에 갔어요.”

“왜 갔어요?”

“몸이 아파서 갔어요.”

“아, 그렇구나.”

휴, 아무도 예준이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예준이의 실수보다 아이들이 눈치채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최대한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해냈다. 긴밀하고도 긴박한 순간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는 우리 반 유찬이가 토를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점심시간 전에 복도에서 한 구토라서 양(?)도 많지 않았고, 교실에 냄새도 퍼지지 않았다. 그래서 멘붕 없이 재빨리 대처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마치 이 사건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회용 장갑을 끼고, 보건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큰 티슈로 싹싹 흔적을 없앴다. (10초 컷!)


오늘 예준이의 실수는 큰 실수가 아니었다. 다행히 어머님이 바로 연락을 받으셨고, 마침 집에는 할머님이 계셨다. 게다가 친구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 이 부분은 정말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은 부분이었다. 아! 이 얼마나 완벽한 하루인가!


1학년 교실은 그야말로 정글이다. 야생이 살아 숨 쉬고 때때로 본능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나는 그 속에 살고 있지만 늘 운이 좋다.

구토도 문제없이 해결했고 대변도 큰 소리 없이 잘 해결했다. 심지어 소변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아, 이 얼마나 운이 좋은 교사인가!


우유 먹고 토하는 학생, 심각하게 대변의 흔적을 남긴 학생을 만났다면 나 또한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반 학생들은 소소하게 나에게 숙제를 던져주었다. 이 정도면 귀엽고 사랑스럽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다.


나는 참 운이 좋다. 내일도 모레도 운이 좋을 것이다.


하하하하하. (웃음의 의미는 비밀)


                    

작가의 이전글 법정교육시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