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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빛깔 1학년



‘갑자기 우유 빛깔 1학년이라니? 선생님 제정신이십니까?’

‘혹시 교실에서 기적이 일어났나요?’

 

어쩌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요즘 힘들다고 한참 투정 부리던 내가 이런 파격적인 제목을 지은 이유는 약 다섯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글을 따라오다 보면 우유 빛깔의 색감을 깊이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우유갑 까주세요.

한두 명은, 아니 열 명 정도는 너끈히 까 줄 수 있다.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혼자 끙끙거리다가 나온 친구들의 우유갑이다. 우유갑과의 사투를 벌인 결과 종이 우유갑이 너덜거리는 상태로 들고 오는 학생들이 있다. 그의 애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내 손이 닿자마자 우유갑은 혼수상태가 된다. 가위 등을 이용해 최대한 잘 마무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심폐소생술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우유갑과의 전쟁 없이 순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들이 가끔은 더 고맙다.

 

2. 홀짝 섭취족

아이들에게 활짝 열린 우유갑에 자신 있게 입을 대고 목구멍에서 꼴깍꼴깍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마셔주기를 매일 당부한다. 우유 먹을 때는 우유에 집중하기! 매일 부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학습지를 하면서 아주 여유롭게 우유의 맛을 음미하는 학생들이 있다. 어떻게 보면 그 행동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다가 우유를 꼭 쏟는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1~2명의 학생들이 교실에 우유를 쏟는다. 나는 빠르게 출동해서 우유를 닦는다. 바닥에서 만나는 우유는 참 비리다. 이제는 홀짝홀짝 우유를 마시는 학생들만 봐도 바로 그 비린내가 난다. 얘들아! 제발 우유갑을 활짝 열고 꿀꺽꿀꺽 마셔주렴. 그럼 너희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을 거야. (훌쩍훌쩍 눈물의 호소)

 

3. 우유 토하기

젤 견디기 힘든 미션이다. 우유 개별적으로 신청해서 제공받는 제품이기 때문에 신청한 학생들에게 되도록 먹이려고 노력한다. (우유를 신청한 엄마의 마음을 잘 알기에) 그런데 우유를 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냥 쏟은 우유 닦기의 난이도가 1단계라면 토한 우유 닦기는 5단계쯤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묵묵히 닦는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1학년 담임이니까. (정신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4. 우유갑 밟기

쉬는 시간에 연구실에 잠시 다녀왔더니 교실에서 난리가 났다. 

“선생님! 00이가 우유갑을 발로 밟아서 터트렸어요!”

심호흡을 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 바닥이 하얗다. 이게 꿈이라면 바로 교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현실 세계 속에 있다. 누가 봐도 저것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 출구는 없다. 울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일단 교실 바닥과 벽을 닦았다. (아흑 주먹이 운다)

 

5. 숨겨진 우유갑 찾기

우리 교실에는 앙증맞은 휴지통이 있다. 하얀색 직육면체의 미니 휴지통인데, 발로 밟으면 뚜껑이 열린다. 원래 교사 책상 주변에 두고 활용하는데 청소하다가 우연히 교사 책상 멀리 두게 되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그 휴지통을 원래 자리에 갖다 두려고 들었는데 왠지 묵직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려놓고 발로 미니 휴지통의 페달을 경쾌하게 눌렀다.


으악! 기상천외한 장면이다. 쓰레기통 안에 우유가 찰랑찰랑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그 위에 초록색 우유갑이 돛단배처럼 유유히 파도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19년 교직 생활 중에 처음 겪는 일이다. 일단 급히 화장실로 가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래, 천재야. 녀석은 천재가 틀림없어. 기발하다 기발해!’


욕 대신 그(놈)의 천재성을 칭찬했다. 누군지 짐작은 가지만 아쉽게도 물증이 없다. 다음날부터 한동안 느슨해졌던 ‘우유갑에 본인 번호 쓰기 제도’ 운영에 박차를 가한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확실한 물증 확보하기 위해!


내게 우유 빛깔은 뽀얀 느낌이 아니다. 비린 향, 울렁거림, 열받음이라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해리포터 속 구토 맛, 귀지 맛 젤리빈 같은 느낌과 비슷하다. 덕분에 요즘 생우유와는 멀어졌지만 라테와는 더 가까워졌다. 카페인 없이 버틸 수 없는 하루를 라테의 고소함으로 위로받고 싶어 작년보다 더 많이 마시게 된다.

 

카페인의 쓴맛을 고소함으로 감싸주는 우유의 그 기특한 빛깔이 우리 반에도 산뜻한 느낌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아무리 이렇게 글로 포장해도 나는 여전히 우유와의 전쟁 중이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자. 으라차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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