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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별 Oct 30. 2022

너의 의미

나를 완전하고, 불완전하게 하는

남편은 나처럼 자신에게 엄격하면서, 자존감이 높은 자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혼자 깊이 굴을 파고, 거기서 또 헤쳐 나오는 걸 매일 지켜보면서 감탄하듯이 그랬다.


자책과 자기 위안 둘 다 나의 특기다. 내 본성을 불신하지만 노력하는 능력은 신뢰하고, 무엇보다 나란 존재를 세상 제일 사랑해서 그렇다. 이런 복잡다단한 자아를 갖게 된 것은 생각할수록 그분 탓이다.


할머니.





할머니 손에 컸다. 어릴 적에 엄마 아빠랑 놀러 간 기억은 있지만, 집에서 부대낀 기억은 그다지 없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었고 그 결과 엄마는 대가족의 가사에, 아빠는 회사에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은 자연히 같이 사는 조부모, 그중에서도 할머니 차지가 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집의 막내딸. 개성에서 자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들어보면 그닥 살가운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밥상에서 혼난 이야기, 오빠랑 비교당한 이야기,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던 이야기… 그런 것들이 전부였으니까. 공부는 오래 못했지만 할머니는 영민했고, 삶의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6.25가 터졌을 때 부산으로 내려와 간호사가 되었고 당시로선 꽉 찬 나이인 20대 후반에, 함경도에서 내려와 군인이 된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할아버지와도 그리 다정한 부부 사이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전국의 부대를 도는 사이에 의지할 친정도 시가도 없는 남한에서 기운 센 세 아들을 전쟁 같이 키웠다.


그런 할머니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할머니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사랑한 존재였다. 생활에 쫓기지도 않고, 바르게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이. 할머니는 정말 나를 사랑만 했다. 눈만 깜박여도 예쁘다 하고, 숨만 쉬어도 잘한다 잘한다 했다. 딸을 갖고 싶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할머니에게 집안에 삼십 년 만에 태어난 여자 아기는 그 자체로 사랑이고 자랑이었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전부였다. 하루 종일 할머니랑 놀고, 밥을 먹고, 쉴 새 없이 간식을 받아먹고, 나란히 만화영화를 보고, 동요란 동요를 다 배웠다. 목이 쉬도록 책을 읽어준 할머니 덕에 한글을 절로 깨쳤다. 배가 아파서 웅크리면 “할머니~ 손이~ 약손이다~” 노래 같은 주문과 주름지고 따뜻한 손이 나를 재웠다. 밤에 놀래서 깨면 그 손이 내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날이 좋으면 같이 동네를 돌고, 그러다 업혀서 돌아오고, 날이 추워지면 할머니가 털실로 떠준 스웨터를 입었다. 나는 나의 온 세상에게, 온 마음으로 사랑받았다.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그거 듣느라고, 돌도 안된 내가 한참을 제 발로 서 있었다고. 뽀얀 얼굴에 세일러 원피스를 입혀서 데리고 나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귀여워했다고. 할머니가 공부하던 기도문을 먼저 조잘조잘 외워서 신부님이 그렇게 예뻐했다고. 나는 서른이 넘어서까지 아흔 넘은 할머니에게 어제처럼 생생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지친 퇴근길에도 핸드폰 너머 “할머니~” 부르고 “새별이니?” 대답이 들리면 기운이 났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에 침대에 누워만 지내실 때도 첫째의 돌엔 꽃분홍 공단 봉투에 편지를 써주셨다. 노환으로 말 한마디가 힘겨워졌을 때도 할머니는 내 입덧과 건강부터 걱정했다. 내가 둘째를 무사히 낳자마자 이제 됐다는 듯이 눈을 감은 할머니. 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을 들고 떠났고, 어린 나와 함께 여기 남았다.





할머니가 된 엄마를 보며, 내가 아이일 때 보지 못한 다정함을 내 아이들에게 쏟아붓는 엄마를 보며 나의 할머니를 생각한다. 원망하던 적도 있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 할머니가 있어서 나 어릴 때 엄마를 누리지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내가 그 시절의 엄마 아빠에게서 할머니가 준 만큼의 무한한 사랑을 받기는 힘들었을 거란 것을. 아이에게 염려와 책임감이 앞선, 어리고 엄격했던 부모에게서 할머니가 내 마음을 지켜줬다는 것을. 내가 태어나자마자 사랑만, 오직 절대적인 사랑만 배우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로 인해 부모와 멀찍이 컸고, 대신 단단한 자기애를 얻었고, 아이들에게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는, 하지만 아이가 삶의 일 순위가 아닌, 그래서 불행하고도 행복한 엄마가 되었다.

인생은, 사랑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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