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터틀 키우기] 감각적 예민함
코로나로 거의 삼시세끼 집밥을 먹으며 즉석밥 소비도 늘었다. 넉넉하게 밥을 하면 찬밥이 남고 딱 맞게 하면 약간 모자란다. 이럴 때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밥은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천재가 틀림없다. 편리한 데다 내 입맛엔 밥맛도 훌륭하다.
그/러/나 즉석밥을 거부하는 자가 우리집에 살고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터틀이.
“엄마, 밥알이 왜 이렇게 뚱뚱해? 맛이 없어”
“......... (이 녀석이 설마 즉석밥을 구별할까???) 왜? 쌀밥 맛있잖아?”
“아냐 맛이 없어. 다른 밥 줘”
“.........(우어어어어어) 음 지금은 이 밥밖에 없어. 그냥 먹어. 다음에 다른 밥 해줄게”
깨작깨작 식사를 끝낸 터틀이의 밥그릇엔 즉석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짜증이 무럭무럭 한숨이 푹푹. 즉석밥이 맛있는데 왜 싫어하냐며 터틀이에게 물어봤더니 (이 녀석아 이유를 대랏!) 보통 밥알은 쫀득해서 맛있는데 즉석 밥알은 뚱뚱하고 물렁물렁해서 싫단다. 그러고 보니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하네..흠
어쨌든 식감에 예민한 터틀이가 한번 거부한 음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10년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앞으로도 즉석밥을 주면 터틀이는 먹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괘씸한 녀석 같으니.) 하지만 주방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터틀맘이 즉석밥의 편리함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을까?
며칠 후 다시 즉석밥 위기가 찾아왔다. 터틀이 아빠가 회식이 취소돼서 집에 왔고, 터틀이 누나(코알라)와 난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검도를 다녀온 터틀이와 아빠를 위해 저녁상을 다시 차리는데 밥솥에는 밥 한 그릇 분량만 남아 있었다. 순간 갈등하다가 즉석밥을 터틀이에게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즉석밥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밥솥에 남아있는 밥과 골고루 섞어서 터틀이와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태연하게 그릇을 정리하며 터틀이가 잘 모르고 먹겠지 내심 안도하고 있는데..
“엄마”
“(이 녀석이 왜 밥그릇에 코를 박고 밥알을 들여다보고 있지???) 왜?”
“밥이 이상해. 뚱뚱한 것들(!)이 섞여 있어”
“으응?”
터틀이는 젓가락으로 즉석밥의 밥알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런!!!)
결국 이날 터틀이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그냥 먹어! 소리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고) 밥이 모자라서 즉석밥을 섞었으니 이런 때는 그냥 먹자고 간신히 설득하여 넘어갔다 (물론 밥은 남겼다).
즉석밥 사건의 예상치 못한 수확은 터틀이가 급식을 안 먹는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터틀이 왈
“이 뚱뚱한 밥(즉석밥)은 그래도 최악은 아냐. 급식 밥은 진짜 싫어. 그건 밥알이 아냐. 그런 걸 누가 만들어 이씨 난 절대 안 먹을 거야!”
읭?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터틀이는 참으로 꾸준히 급식을 거부했다. 해마다 선생님 면담을 갈 때마다 급식 얘기가 주요 화제여서 터틀맘은 올해는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항상 고민이었다. “편식을 하고 먹는 속도가 느려서 안 먹나 봐요. 집에서 고치도록 지도하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선생님”
그런데, 의아한 점은 급식 메뉴에 상관없이 정말, 꾸준히, 쭈욱 터틀이가 급식을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편식한다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는 날은 급식을 잘 먹을 것이다. 그러나, 터틀이는 급식에 손도 안 대는 날이 대부분이라고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터틀이의 급식 안 먹기 미스터리의 정체는 바로 밥의 식감(!)이었던 것이다. 털썩
누가 느린 사람은 보통 둔하다고 했는가? 속 터지는 느림보 터틀이는 행동도 느리고 말하는 속도도 느려서 천하태평으로 보인다. 보통 느린 사람들은 까칠하고 예민하기보다 여유롭고 자극에 둔감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터틀이는 식감의 일인자였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착잡한 마음에 홀로 맥주를 들이켰다.
즉석밥은 포기한다 해도, 급식에 나오는 찐밥을 터틀이가 계속 거부하면 어떡하나? 초등학교는 그나마 일찍 끝나니 배고파도 참다가 집에 와서 먹지만, 더 늦게 끝나는 중고등 학교에서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찐밥을 거부하면 나중에 군대 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녀석이 쓸데없이 예민해서 밥의 식감을 따져? 어이구 저걸 어떻게 고치나..’
화나고 답답하고 걱정되고.. 터틀이 탓을 하다가 집에 있던 책을 꺼냈다.
롤프 젤린의 “예민한 아이의 특별한 잠재력”
예민한 성격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하나의 기질일 뿐 병이 아니다
뜨끔. 사실 나도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심지어 터틀이 아빠는 나를 넘어서는 예민함을 자랑한다. 나는 두통 때문에 선물 받은 향수도 사용 못하고, 터틀이 아빠는 소음과 밝은 조명, 사람 많은 곳은 일단 피하고 본다.
불쌍한 터틀이. 터틀이가 예민한 건 나랑 남편이 물려준 유전자 때문이구나. (게다가 그는 진정 청출어람이다.) 터틀이 탓을 하면 안 되지. 일부러 예민하게 느끼는 것도 아닌데.. 어릴 때 신경질적이다 까칠하다 지적받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게 잘못된 건가, 표현하면 안 되는 거구나 위축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민함이라는 선물을 거부한 성인들이 있다. 아마도 예민한 성격을 경계하거나 터부시 하는 분위기 때문에 이들은 선물을 거부하고 부정하느라 아예 풀어보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적 특성과 재능은 외면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 예민함은 영원히 그 사람의 일부로 남아 있다.”
나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예민함을 감추고 무난해 보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잘 안되고 힘들고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예민함을 단점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을 터틀이가 물려받은 것을 보며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고치거나 덮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민한 사람이 이를 장점으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약점이 되어버린다
마시던 맥주를 쭉 넘겨 한 캔을 비우며 다짐했다. 그래, 예민한 거 평생 못 고친다는데 터틀이 장점으로 인정해주자.
어제도 저녁밥이 살짝 모자라서 즉석밥을 하나 데웠다.
“이거 뚱뚱한 밥이 섞였잖아?”
“우와 우리 터틀이 수퍼파워~~~~ㄹ!!! 이렇게 잘 맞추다니 즉석밥 만드는 회사나 전기밥솥 회사에서 스카우트하겠는데?”
“(씨-익) 수퍼파워? 하하하”
밥맛 감별의 일인자 수퍼파워 터틀이가 해맑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