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습니다. 이가 빠지는 꿈이었어요. 어딘가 께름칙해서 찾아보니 가족의 건강이 악화되는 흉몽이랍니다. 설마.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날 오후 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
생방송까지 세 시간밖에 남지 않은 터라 급히 대체자를 찾기도 어려웠고 맡은 일은 하고 가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방송 중간중간 슬슬 웃어도 가면서 어찌저찌, 무사히 방송을 끝냈습니다. 그 길로 서울로 내달렸습니다.
시속 300km 이상의 고속열차에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기 어렵기도 하겠지만 그날만큼은 어떤 풍경이었는지 단 한 장면도 기억에 남질 않네요.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자연물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할머니와 추억이 참 많아요. 여름이면 꼭 비빔국수를 만들어주셨어요. 무더운 여름날 학교에서 집에 오면 대중없이 몇 스푼씩 대강 양념을 섞어서, 삶은 국수와 슥슥 비벼서는 제 입에 넣어주셨는데 그 새콤달콤한 맛이 참 좋았어요. 밥솥에 해 먹는 식혜. 온 가족이 몸살 났던 김장날의 김치, 손톱이 초록색으로 물들도록 먹었던 쑥떡도 전부 할머니가 해준 것들이에요.
사실 할머니는 우리집 바람잡이였어요. 바퀴가 반짝이는 킥보드가 유행했을 무렵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라도 부모님은 끝까지 안 사주셨거든요. 그럴 때 할머니가 나서서 부모님을 다그쳤어요. ‘너희 돈 벌어서 다 뭐하냐, 애 그런 것도 안 사주고’ 그러자 그다음 날 기적처럼 퇴근길 아빠 품에 큰 리본이 달린 최신형 킥보드가 들려있던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얻어낸 것들이 모르긴 몰라도 킥보드뿐만은 아닐 거예요.
할머니는 내가 친구와 싸우고 오면 누가 더 많이 때렸냐고 꼭 물었어요. 맞았다고 하면 혼이 났고, 때렸다고 하면 칭찬을 했어요. 또래보다 유난히 체구가 작아서 매일 맞고 다니진 않을까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아요. 울 땐 꼭 소리 내어 울라고도 가르치셨네요. 그래서인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았나 봐요.
엄마 몰래 재봉틀로 손녀딸 교복도 줄여주고, 머리카락도 늘 예쁘게 땋아줬어요. 일하느라 바쁜 엄마의 빈자리를 운동회 때, 졸업식 때, 그런 기념식 때마다 할머니가 채워주셨어요. 나이 오십에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했던 할머니의 노력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듣기론 마지막 가시는 길도 할머니 다웠습니다. 자식에게 짐 되기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서 주무시듯이 숨을 거두셨어요. 남은 사람들에게 이별의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은 게 내심 속상하긴 하지만 어쩌면 할머니에게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아름다운 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한 줌 재가 된 할머니를 보며 인생이 참 허망하다 싶다가도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산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생각을 고쳐먹네요.
할머니 때문에 내 취향이 또래에 비해 촌스러워진 것 같다고 투덜대기도 했지만 지금 내 친구들 중에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를 다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울 할매 덕분에 인사성 밝고, 트로트도 잘 부르고, 승부욕도 강하고, 욕도 잘하고(?) 그렇게 잘 컸어요. 정말 할매 덕분이에요. 근데 서른이 되도록 키워주셔서 감사하단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했네. 할매 키워주셔서 참말로 고마워요. 할아버지 곁에서 편하게 행복하게 지내셔요. 거기선 무릎도 안 아플 테니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