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싱지원 Feb 02. 2024

마지막 인사

2019.10.21~24.2.2

 늘 떠나보내기만 하다가 제가 떠나는 날이 오네요. 떠나보내는 사람 마음도 떠나는 사람 마음 못지않게 어수선하다는 걸 아는지라 유난스럽지 않게 떠나려 했는데 그게 또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거 있죠. 역시 저는 쿨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사실 라이브경남이라는 프로그램, 뉴스 9 경남은 제가 적임자여서가 아니라 해야 할 사람이 없어서 맡게 되었던 것 같아요. 가진 것보다 큰 역할이 처음부터 주어져 벅찰 때가 많았지만 돌이켜보니 이 자리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매일같이 수험생처럼 공부하고 병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간극을 메우려고 애쓰다 보니 어느새 그 자리가 원래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졌어요.


 5년 전, 방송을 맡은 지 한 일주일쯤 되었던 때였을 거예요. 우연히 KBS 1라디오 편성표를 쭉 보는데 아무리 봐도 20대 여자 진행자는 저뿐인 거예요. 아니 애초에 여자 진행자는 저를 빼도 단 한 명뿐이었고, 그분은 20년도 더 된 경력을 가진 분이었고요. 그때부터 '내가 이거 해도 되는 건가' '20대, 여자, 신입, 아나운서에게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한없이 쪼그라들었죠. 그래서 몇 달간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목소리도 힘을 주고, 여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처럼 흉내를 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늘 그렇듯 '척'은 얼마가지 않아 들통이 나고 말았지만요.


 요즘 라디오 누가 듣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죠. 라디오 시대는 지났다고요. 숏츠나 릴스같은 자극적이고 짧고 화려한 영상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라디오는 조용하고 지루하기만 하다면서요. 하지만 매일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시는 택시 기사님들이 웬만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알고 계시는 걸 보면... 20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 해고 통보받고 집으로 가는 길, 진행자의 한 마디에 ‘그래, 세상이 무너졌냐. 저녁 먹고 다시 힘내보자'며 용기를 얻는 걸 보면... 적막한 경비실에 말벗이 되어주어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면. 이런 매체가 또 어디있을까 싶어요.


 라디오는 보통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잘 듣지 않거든요. 주로 혼자 있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매체예요. 그래서 같은 주파수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답니다. 또 사는 게 바빠서 얼마간 못 듣고 지냈어도 늘 듣던 그 시각에 주파수를 맞추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안도하게 되는, 등대 같은 매력이 있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시사도, 뉴스도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걸 배운 시간.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기쁨을 만끽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두 발 나아가기 위한 한 발 물러서기라 생각하고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혹시나 마지막 방송을 함께 못하신 우리 청취자분들께, 갑자기 진행자가 바뀌어서 놀랄 분들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바라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약속을 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