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를 동경하던 P, 있는 데로 살자.
계획 수립의 끝판왕이라는 J. 나는 J는 아니지만 늘 J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항상 1년의 목적과 목표를 세웠다. 연말에 내가 세운 목표들을 얼마큼 달성했는지 체크하는 일은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매일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계획한 일정대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정이 틀어지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이어리에 적힌 일정 그대로 소화하기를 바랐다.
여행을 갈 때도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어 꼭 들러야 할 장소를 체크해두고, 가장 시간 소모가 적은 효율적인 루트를 짰다.
이렇게 보면 엄청나게 J성향인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았다. 계획을 잘 짜둬도 변수가 생긴다거나, 그날의 기분이 특별하면 내가 세운 계획을 언제든지 틀어버렸다.
나는 그저 J를 동경하는 P였다.
퇴사가 예정된 해는 목표 수립이 참 어려웠다. 나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퇴사를 했지만, 뭘 해야 그걸 이룰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한 달 제주살이였을 뿐이다.
나와 친한 이들은 다 한 번씩 물어봤다
“제주에서 뭐할 거야?”
“나도 몰라, 모르겠어”
그렇게 아무 계획도 목표도 없는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제주에서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이라고는 동호회에서 하는 스노클링 일정 정도.
아침에 일어나면 느긋한 산책을 다녀오고, 쌀밥과 고등어를 구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아침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오늘 갈 곳을 검색했다.
짧은 여행 시간 안에 다 돌아다녀야 하는 부담이 없으니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하루에 한 곳, 좀 부지런히 움직이면 두 군데 정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계획을 세웠다면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주에서 매일 물에서만 노는 것 같아서 오름을 가볼까 했다. 가까운 오름을 검색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 음악을 들으며 가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버스에서 내려서 원래 가려던 곳으로 갔을 텐데,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긴 다음에 가면 되지’
내가 실려있는 버스의 노선에서 갈 수 있는 오름을 검색했다.
‘거문오름? 오케이 가자!‘
20분 정도 더 가서 거문오름 입구에서 내렸다. 엄청나게 햇빛이 뜨거운 날씨였다. 하필 입은 옷이 다 검은색이라 모든 햇빛이 나에게만 쏟아내리는 것 같았다. 거문오름 입구라고 해서 내렸더니 입구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렇게 걸어서 15분, 간신히 입구에 도착하고 입장권을 구입하려고 보니................
사전 예약자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냥 웃음만 나왔다. 어이없어서 나온 웃음인지, 이 상황이 정말 웃겨서 나온 웃음인지
“아 가던 데로 갈 걸.....”
순간 나는 나답게 행동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냥 목표한 곳으로 갈걸 왜 방향을 틀어서.... 이 고생을 할까............. 집에 갈까...? 지칠 때로 지쳐서 터덜 터덜 걸으며 나와보니 버스가 한 대 있었다.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타버렸다. 아무 버스나 타면 일단 큰 도로로 가겠지 싶었다. 그렇게 우연히 탄 버스는 원래 내가 가려고 했던 오름에 가는 버스였다.
원래 가려던 곳을 실수로 지나쳐서 다른 곳을 가려다가 망해서 아무 버스나 탔더니 원래 가려던 곳에 갔다. 이게 무슨 시간 낭비고,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기도 했는데.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보니 생각보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거문오름 방문 사전 예약을 했다.
개고생을 했지만, 그 덕에 거문오름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나는 버스를 놓치면 놓치는 데로, 가면 가는 데로 발길을 옮겨 여행을 했다.
늘 목적이 있어야 했고, 목표가 있어야 했고, 계획이 있어야 했던 나는 정처 없이 제주에 떠돌고 있었다.
뭐야 그래도 살만 하잖아.
길은 어디에나 있었다.
방향을 틀면 다른 길이 있었다.
목적과 목표가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생각보다 다양한 길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
MBTI J를 동경하던 P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