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겁이 많다. 오감이 발달해서 갑작스러운 색의 변화나 소음 등에 공포를 느낀다. 어릴 때부터 주위 환경에 너무 예민해서 스스로 몸을 위축시키며 움직였다. 승모근은 단단해져 갔고 경추는 숙여졌다. 의식적으로 허리와 어깨를 펴도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다시 굳혔다. 나를 향한 비난은 물론 칭찬도 두려워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박수소리가 나의 존재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칭찬받을만한 자격도 능력도 없는 데 친구들은 나를 높이니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주위의 어른들은 날 이해하지 못했다. 겁이 내 몸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날 때부터 겁쟁이인지라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거나 억울하게 책임을 지는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지금도 무의식 속에 박혀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맞던 날들, 그날엔 아무리 나의 결백을 주장해도 진심은 통하지 않는 법이며 날 때리고 폭언하는 그 사람들의 흥분한 눈빛과 구겨진 입술이 생생한 기억 속 이미지가 된다. 나를 높이 평가하던 친구들에게까지 의심을 받으며 조롱당할 때는 진짜 마음이 아팠다. 그런 경험이 쌓이게 되니 겉모습만 보고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미란 1도 없는 삭막한 환경이다. 어른이 어른답지 않는 곳은 아이들이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안일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아이들은 금세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삭막한 어른들은 아이가 아이다울 거라는 동심에 빠져서 자녀들을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미숙한 성인들은 훗날 자녀를 양육할 때 '아이가 아이를 키운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될 것 같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적어도 내겐 추상적인 말에 불과하다.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이며 용기도 단지 용기라고 생각한다. 둘은 늘 공존하는 것이며 더 큰 한쪽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 시합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날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겁이 많아 긴장하는데 감기에 걸려 열까지 오른 상태였다. 부모님과 관장님은 날 말렸다. 그럼에도 시합장으로 들어갔다. 품띠를 따야 했기 때문이다. 몸이 경직된 상태라 자세에 흔들림이 사라진 건지는 몰라도 시합에서 이겼다. 관장님은 품띠를 내 허리에 메주며 말해주셨다.
"품띠는 우리 도장에서 주는 거야. 시합에서 져도 상관없었어, 껄껄."
나는 띠의 촉감이 시시하다는 걸 뉘우치고 태권도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훗 날 이 추억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이 아무리 커도 용기가 그보다 살짝만 크면 행동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MBTI라는 것이 떠돌길래 인터넷에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나는 'INFJ'였다. 이 유형의 성격이 흔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막상 검색해보니 한국엔 제법 많은 것 같았다. 나의 성품을 4자로 풀이한다는 게 맘에 안 들었지만 복잡한 심리상태를 여러 사람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된 건 사람을 분류하고 재단하는 새로운 잣대가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가장 '인프제'다운 태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 가장 '인프제'스러웠던 경험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한 행동에 따른 수천 가지의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주위에 여러의 벽을 세우며 혼자만의 시간을 오랫동안 가져야 한다. 특히, 누군가를 만날 땐 그 사람의 눈빛, 표정, 말투, 행동 등 예측 불가능한 요소에 의해 내 언행이 바뀔 것이 두려워 약속 전날 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될 정도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고 그 결과가 허무할 정도로 안심이 될 때 내가 세운 벽들이 허물어지고 만근 염려가 거품처럼 사라지고 승모근과 경추가 녹아버리게 된다.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시간낭비를 남발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인프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겁쟁이가 가지는 보물을 알고 난 뒤론 그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겁쟁이, 두려움을 잘 찾고 몰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이가 울고 있다면 겁쟁이는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는 못해도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넌지시 알린다. 그런데 아무도 그 겁쟁이의 표현을 공감하지 않는다. 겁쟁이는 화가 나서 우는 사람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키며 친구들의 시선을 유도한다. 여전히 친구들은 우는 사람을 찾지 못한다. 겁쟁이는 답답해서 우는 사람에게 다가가 묻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우는 사람은 겁쟁이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로 겁쟁이는 사람들의 일기를 대신 써주며 위대한 작가나 감독이 된다.
겁은 숨겨진 인간의 감정을 찾는다. 그래서 꼭 살 떨리는 두려움만이 지배하는 심리는 아닌 것이다. 자신의 분노와 수치가 무엇인지만 알아도 겁은 만들어진다. 주의해야 할 점은 겁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겁은 피부에만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말 안 듣는 짐승이기에 잘 훈련시켜서 집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겁은 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아 버린다. 겁에 잡아먹힌 자는 실체 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마음속 재산을 탕진해버린다. 반면에 마음의 문을 잘 단속하는 자는 마당에서 사납게 짖는 개로부터 재산을 영원히 지키게 된다.
문 밖에서 짖는 두려움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