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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letterpot Dec 10. 2021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Listen to your mind

대학 시절, 4년 동안 기숙사에 살았던 나는 학기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날 남들보다 두 배는 바쁘게 보내야 했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기숙사 짐을 빼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또 방을 옮겨 짐을 풀며 스트레스받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기숙사 건물이 여러 곳이었기 때문에 짐을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숙사의 작은 옷장을 꽉꽉 채운 옷들을 박스에 담으며 '이래 놓고 또 옷을 사다니, 내가 미쳤지' 하고도 학기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룰루랄라 쇼핑을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업보를 쌓아 이고 다녔다. 이사는 너무도 지긋지긋했고 옷걸이가 겹치지 않게 옷을 걸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이사로 얼룩진 대학 졸업 후, 나는 호주에서 지내다가 남미로 세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전히 내 발목을 잡는 것은 짐 싸기였다. 포기할 수 없는 게 많아 60L 배낭을 꾹꾹 눌러 담았고, 그 가방이 너무 무거워 가끔 앞으로 고꾸라졌다. 여행이 계속되며 배낭은 점점 더 부풀어갔고 내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여행 끝무렵 즈음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의 침대에 배드 버그가 있어, 로비에서 밤을 꼴딱 새운 참이었다. 터덜터덜 혼자 길을 걷다 별생각 없이 문이 열린 빈티지샵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물건과는 다르게 고이 자물쇠가 채워져 한쪽 벽에 소중하게 전시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비통이었다. 

그때 나는 조금이라도 돈을 절약하려고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야간 버스를 타고 8시간씩 이동하던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지만, 마음속에서 "이건 사야 해...!" 하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가방의 모양도, 서사도 완벽하다. 와인과 탱고의 나라에서 산 빈티지 루이비통이라니! 고이 모시고 와 배낭의 자리를 비웠다. 배드 버그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보험이라도 든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갖고 싶은 게 많았다. 꼭 다른 친구들은 잘 신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했고, 학교에 누구도 없는 가방을 메고 다녔다. 조금 커서는 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옷을 많이 사들였다. 좋은 가방과 신발도 언제나 나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돌아보면 그때는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나를 증명하려 했다. 특별한 것을 가져서, 사람들이 나를 특별하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내가 조금씩 변한 것은 미니멀리즘이라는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최소한의 꼭 필요한 물건만을 남김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미니멀리즘의 가르침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놀라웠다. 한참 삶의 본질에 대한 생각이 많을 무렵이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쳇바퀴 같은 삶을 더 이상 이어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다음 날 다시 눈을 뜨지 않게 된다면 나의 짐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마음이 헛헛해 더 잦아지던 의미 없는 쇼핑을 멈추었다. 옷장을 비우고, 신발장을 비워냈다. 어찌나 물건이 많았는지, 아무리 버려도 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여전히 이런저런 물건이 많은 나의 집은 누가 봐도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사지 않는다. 배낭에 꾸역꾸역 담아 온 빈티지 루이비통백도 중고 사이트에 저렴한 가격에 처분했다. 가끔씩 그 완벽한 자태가 그리울 때가 있지만, 나에게 그 가방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매끈한 명품 가방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였다. 



미니멀리스트 '지망생'으로 살아오며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욕망을 물건에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사회와 기업에 의해 부추겨진다. 기업은 물건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것도 없어? 다른 사람은 다 있는데?" 혹은 "이것만 가지면 삶은 더 완벽해질 거야!" 혹은 "이 물건으로 당신의 가치를 증명해 봐!". 

얼마나 많이 가졌냐와 상관없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건강 칼럼에서 생뚱맞게 미니멀리즘이란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과잉인 현대 사회에서 선택지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클릭 한 번이면 주문부터 결제까지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자꾸만 소비를 부른다. 더 쉬워지고, 더 빨라지고, 더 많아졌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그친다. 오늘 주문해서 내일 받아보는 그 물건이  차지하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삶의 한 켠임을 자꾸만 잊게 만든다. 


미니멀리즘은 물건의 가짓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삶의 본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만족의 기준을 내부에서 세우는 일이다. 더 단순하고, 더 명료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면 가장 나다운 삶의 모양이 보인다. 보려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지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 사색은 절대적으로 당신의 것이다. 


신상 가방이나 비싼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아도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초라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언제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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