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민주 Dec 03. 2024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11 런던(D+9)

2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또다시 6주간의 긴 여행길에 몸을 실었다. 여행을 하며 가장 고치기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루를 의미 없는 일들로 채워가야 하는 시간이다. 계획했던 대로 일들이 흘러가지 않을 때, 시간과 돈을 들여 이 멀리까지 와 놓고는 정작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좌절감에 빠진다. 내가 선택한 곳은 주요 관광지거나 수도 근처였기 때문에 당일 아침에 계획을 짜도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여행을 하는 동안 일명 ‘쓰레기데이“라고 불리는 날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를테면, 계획했던 일들이 모두 어그러지거나,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다. 런던에 있는 동안 보냈던 시간이 그랬다. 런던에서의 다섯 번째 날. 전날 가고 싶었던 곳을 모두 갔던 데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가지 못하게 되면서 하루가 통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아홉 시 즈음에 들어온 룸메이트가 집 앞까지 따라온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은 상태이기도 했다. 오전 내내 고민을 하다 내린 결정은 세인트폴 대성당을 보고 소호거리에서 쇼핑을 하는 것뿐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일찍 들어와 다음날 이동할 짐을 싸고 집에서 글을 좀 써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늘그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나가는 길. 런던의 건물은 멋스럽고, 햇빛은 찬란하다. 기분이 좋았다. 밝은 햇살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마음이 편안했다. 역시나, 런던은 나와 맞는 도시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하철을 타는 것도 어쩐지 익숙했다. 따로 지도를 보지 않았음에도 역내 지하철 노선표만 보고 쉭쉭 걸어 다녔다.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가방 하나 매지 않고 돌아다닌 나를 보고 누구도 나를 관광객이라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도착한 세인트폴 대성당. 이곳은 해리포터가 덤블도어에게 할 말이 있어 기다리던 중에 시리우스의 과거를 엿보게 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도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은 세계에서 돔 형태의 성공회 성당 중 두 번째로 돔이 가장 큰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입장료가 35파운드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매표소를 찾아다녔는데 매표소가 없는 거다. 줄은 서 있고, 보안검색도 하는데 매표소가 없다고? 뭔가 이상해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하필! 미국과 영국이 합동하여 큰 행사를 치르는 땡스기빙데이 행사를 하는 날이라는 거다. 그래서 행사 동안 투어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기도를 드려도 되나요?라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려 35파운드(한화로는 약 7만 원 정도 될 거다)인  관람료를 무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나, ‘고풍스러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디자인이었다. 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속에 앉아 내부를 구경하며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기도도 드렸다. 햇빛이 얼마나 찬란하게 들어왔는지 모른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나는 나의 여행의 ‘안녕’을 빌었다. 그 공간에 있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1시간이 지나도 행사가 끝나지 않는 거다. 노래 불렀고, 입장했고, 연설도 했고, 사람들 분위기 좋게 하하호호 웃었고, 그런데 또 뭐가 필요해? 도저히 공연에 공연이 끝나질 않는 거다. 오전 내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버린 거다.


”뭐 도와줄까요?‘


 나는 그의 물음에 어버버, 제가 관광객인데 나가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화장실을 찾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오만 생각을 했다. 이거이거. 신자도 아닌데 무단으로 들어가서 괜히 혼나는 거 아니야? 나는 어떤 변명거리를 댈까 고민하다 다음 행선지를 검색했다.



소호거리를 가는 길에 트라팔가 광장을 잠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라팔가 광장은 이미 두 번 정도 지나왔지만 영국박물관을 가는 길에 지나쳤던 오전의 트라팔가 광장을 보고 싶었다. 밤의 광장이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낮의 광장은 봄을 깨문 듯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런던의 마지막인 만큼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화장실 문밖에서 누군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니 머리를 한쪽으로 질끈 묶은 직원이 서 있었다. 왠지 스산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매무새를 정리하고 조용히 출구를 찾았다. 그런데 이 교회, 크기는 그렇다 쳐도 출구를 도저히 못 차겠는 거다. 이거 어쩌지? 살금살금 교회 복도를 헤매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직원이 서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내게 오늘은 행사를 하는 날이라 투어가 불가능하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제야 출구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동. 이동하는 중간에 영국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독립출판물을 취급한다는 포일스서점도 들리고, 엠앤엠즈 런던과 레고 매장도 지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낮의 트라팔가 광장 계단에 앉아 갤러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리어 일어났다.



소호거리는 차이나타운을 지나쳐야 했다. 가는 길에 익숙한 분식집이나 스시집, 그리고 홍콩과 대만에서 보았던 체인카페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떠나오며 속옷을 두 장 밖에 챙기지 않아 근처 유니클로나 무인양품에서 속옷을 한 개 정도 더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격을 보고 내려놓기를 여러 번, 오후 시간은 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세 시쯤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서는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고, 밀려둔 일들을 처리하며 주방에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뮤지컬을 보고 귀가한 룸메이트와 공부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기분 좋게 잠들었던 것 같다.


런던에서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파리보다 특별하지 않았고, 원했던 것들을 모두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는 왜 런던에서의 시간이 행복했던 걸까. 편안하고, 잠도 잘 오고, 이렇게 계속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하루에 한 가지 정도 보고 싶은 것이나 가끔 쇼핑도 하며 안온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매일이 이벤트 같은 삶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틀이 멀다 하고 여행을 다니는 삶 같은 건 내 삶의 아주 작은 이벤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런던에서는 주로 사색을 하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중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는 왜 살아갈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였다. 이미 답을 내린 채 파리로 떠나왔지만 이번에 하는 질문은 결이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나의 질문은 ‘독립’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나는 독립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근래에는 독립이 꼭 ‘한국‘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행을 다니며 교환학생이거나 어학연수를 하며 만난 사람들과 우연히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과거에 왜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석사나 박사도 취득하지 않았고, 그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아직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니까.


특별한 추억을 쌓진 않았지만 그래서 내게 런던은 특별한 여행지가 되었다. 런던에서 썼던 글들이 참 많다. 언젠가 이곳에서 쓴 소설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오고 싶을 것 같다. 런던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