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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Dec 12. 2024

감기에 쫄딱 걸려버렸다, 나는 지금 아프다.

#21 베를린 (D+19)

드레스덴에서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인가, 전날 아침에 목이 심하게 붓더니 다음날까지 재채기에 콧물을 훌쩍거리며 돌아다녔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닌다고 해도, 자주 비가 내려서인지, 숙소가 추웠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었고, 자주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챙겨 온 타이레놀을 먹을까 생각하다 일단 나서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아파서일까. 항상 배에 차고 다니던 복대를 깜빡한 것이다. 여권과 신분증이 들어 있는 복대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했는데 말이다. 그걸 빼놓고 숙소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왕궁을 보러 갔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 안에서 그걸 눈치채고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건 다 내 책임이 되고, 모든 선택도 다 내가 해야 한다. 아뿔싸, 싶었다. 대충 왕궁 외관을 둘러보고 다시 숙소로 달려갔다. 곽민주. 네가 오늘 아프긴 아프구나. 여행을 하는 3주 동안 단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서둘러 복대를 챙겨 메고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공포의 지형학을 보고, 이스트사이드갤러리 근처의 서점을 보고, 박물관섬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기예보에도 나와 있지 않던 비가 내리고, 날은 흐리고, 몸은 점점 차가워졌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버스 안에 앉아 몇 번이고 숙소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숙소는 원칙적으로 청소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2시까지 출입할 순 없었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저찌 박물관섬까지 도착. 베를린 대성당을 비롯한 다섯 개의 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는데, 끊임없이 기침이 나온다. 오후 15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나는 관람실 내부로 들어갈까 하다 이대로는 다음날 있을 체코행에 무리가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자. 그때 굳게 마음먹었던 것 같다. 다음에 와도 돼. 오늘은 몸을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겠어. 푹 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근처의 마켓에서 따뜻한 핫초코를 마시고, 피자를 한 입 먹었다. 여기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처음에 내가 주문할 땐 이 가게에만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가게 지붕 아래에서 너---무 맛있게 피자를 먹고 있으니 나의 먹방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와 나중에는 줄을 서기 시작했고, 내가 떠날 때 가게 아죠씨는 내게 엄지를 척 내밀었던 후일담이 있다. 배가 고파서 어찌나 맛있게 허겁지겁 먹었는지 모른다.


베를린은 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문학으로도 유명한 도시다. 베를린 자체는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많은 외국인들이 베를린을 한 달 살기 적합한 도시로 손꼽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베를린에서 글을 가장 많이 썼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박물관이 섬처럼 모여 있을 정도라 하니, 이 내향인들이 얼마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박물관섬에서 인증샷만 찍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구글 지도에서는 정확히 가리키는 지하철역이 있었지만 이제 여행을 하도 하다 보니(?) 구글맵을 무시하고 내 눈치껏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대충 표지판과 노선도만 보고, 이렇게 저렇게 갈아타면 되겠거니 판단해내는 것이다. 심지어 표지판이 다 독일어 써있는데도 말이다. 여행을 하며 생존력이 강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도 적응력 하나는 끝내줬는데, 이제는 쇳덩이로도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한편, 적응력이 너무 좋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갇혀 있던 사고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닌, 나를 틀에 맞출 수 있는 그 ‘틀’을 찾아다녔던 건 아닐까. 아무렴,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에 와 잠시 쉬다 근처의 치즈케익 샵에 갔다. 구글평점 4.5. 이 비싼 유럽 물가에 차를 2잔 마시고, 핸드백만 한 커피를 주문했는데도 10유로 언저리의 금액이 나왔다. (이 정도 금액이면 노동력이 비싼 유럽에선 정말 저렴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숙소에서도 이미 유명한 곳이라, 동양인이 자주 오는지,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할로‘하고 손을 흔든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생강차와 라즈베리 치즈케익을 주문했다. 치즈케익은 듣던대로 예술 그 자체였다. 그 자리에서 해가 까무룩 져버릴 때까지 글을 썼다. 아마 최근 3편의 여행기가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그 카페에서 쓴 글일 것이다.


그렇게 숙소에 와 짐을 정리하고, 새로 들어온 룸메이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다음날 체코행을 조금 앞당겼다. 처음엔 아침 7시. 너무 이른 시간이라 망설였는데, 숙소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곳이기도 하고, 독일은 치안이 좋은 편이라(서울보다 더 안전한 느낌이었다) 쉽게 결정을 바꿀 수 있었다. 베를린 여행기는 여기까지. 다음날 버스 안에서도 여전히 감기는 낫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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