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베를린 (D+18)
전날 드레스덴을 다녀와서인지 베를린에 대한 인상이 한층 좋아졌다. 처음엔 영 알아듣지도 못하는 독일어에, 독일 사람들은 내가 뱉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내 발음이 좋지 않아서인가? 그래서 조금 위축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드레스덴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화기애애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향인들의 도시. 첫인상은 무뚝뚝하게 보일지 몰라도, 한 마디, 한 마디에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아침에 베를린 장벽 기념관과 공원을 다녀온 이후로 중간지점에 있는 서점을 돌았다. 민박집에서 사장님이 알려주신 정보였다. 서점과 소품샵, 그리고 몇 개의 편집숍과 티 브랜드에 다녀왔다. 서점에선 주로 한국문학을 찾았고, 인기 있는 해외 문학을 찾아보기도 했다. 요즘 트렌드는 무엇인지, 유럽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에코백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몰랐는데, 내가 방문한 서점 중 ‘Do you read me?'는 배우 정유미님이 여행 중에 착용한 제품이라고 한다. 똑같은 제품을 구매해 지금 나는 프라하 여행을 하며 들고 다니고 있다. 흐흐흐.
원래는 아침에 장벽 기념관을 갔다 오후에 박물관 섬을 돌아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카이저 빌헬름 교회 근처, 그리고 알렉산더 광장 근처에 마켓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 나는 다시 되돌아오더라도 박물관섬에 먼저 갔겠지만 이상하게 베를린을 기점으로 여행을 막무가내로 하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보다 호기심이 생기면 일단 하차해 관찰하고 보는 사람. 그게 내가 되었다.
어차피 박물관은 해가 져도 볼 수 있는 곳이니까. 마켓은 야경이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가는 길에 잠깐 들러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파리와 런던,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을 거치며 많은 마켓을 돌아보았다. 맛있는 게 보이면 한 입 먹어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념품을 모으거나, 크게 물욕이 없는 나로서는 그동안 마켓의 매력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드레스덴을 기점으로 마켓의 다정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게 마켓은.. 마치 명절에 모인 가족들을 만나는 느낌이다. 옹기종기 모여 ’이거 맛있지? 오늘 요리가 좀 잘 됐어.‘하고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어느 표정들이 생각나는 느낌. 그래서 좋았다. 드레스덴의 마켓이, 그리고 베를린에서도 나는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독일의 정서는 그랬다. 냉소적이었던 첫 이미지와는 다르게 알면 알수록 다정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쉐어하우스에 함께 살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언니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포스가 좔좔 넘쳐 옆방의 이웃이었음에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내 룸메이트인 클라리사가 그녀와 친해 조금씩 눈치를 보며 말을 걸 수 있었고, 두 번째는 크리스마스에 내가 그녀에게 양말을 선물하면서부터였다. 언니는 공교롭게도 INTP. 내향인이었다. 이번 여행을 떠나며 미리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잘 지내고 있냐고. 언니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베를린에 가는데 괜찮다면 한 번 얼굴 볼래? 내 물음에 언니는 회사 일이 많아 스케줄을 잡아보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언니는 내가 드레스덴에 있는 동안 정말로 일이 바빠-언니는 베를린에서 2시간 떨어진 거리에 산다고 했다-만나지 못했지만 내게 베를린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즐거운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고요하지만 친절한 사람. 단단한 사람들. 그것이 내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 독일에 대해 느낀 정서였다. 여섯 밤을 베를린에 있는 동안 함께 방을 쓰는 친구들은 매일 달라졌다. 그중에 처음 베를린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도시가 너무 다크하지 않느냐고. 숨이 막히는 고요한 정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나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제는 베를린을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베를린에 조금만 더 머물면 분명 좋아지는 지점이 생길 거라고 말해주게 된다.
전체가 아닌 귀엽고 다정한 면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윤곽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베를린은 내게 처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베를린을 조금씩 사랑했고, 떠나는 날에는 많이 아쉬웠다. 이들은 화려하거나 소란스러운 흥겨움보단 내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듯하다. 이것은 품위로 느껴지는 것도 같다.
베를린을 여행하며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하리보 매장 방문기. 하리보 매장에 가면 상자를 하나 받게 된다. 그 상자에 내가 원하는 맛의 젤리를 마구마구 담을 수 있다. 무게를 재지 않기 때문에 그저 꽉꽉 눌러 담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의 정서를 무시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꽉꽉 눌러 담았다. 단 3.75유로. 서울에서 하리보를 사 먹는다면 타당하지 않은 양과 금액이다. 이렇게 늦게까지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귀가하고 보니 저녁 7시. 그날 베를린에서의 하루는 마치 서울에서 보내던 하루와 비슷해 나는 간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