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드레스덴 (D+17)
새벽 네 시 반. 눈을 떴다.
새벽 다섯 시.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새벽 여섯 시 반. 숙소에서 살금살금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터미널로 향했다.
모든 게 다 드레스덴 때문이다. 드레스덴은 내가 여행을 가기 전부터 아는 친구로부터 추천받은 곳이기도 했다. 베를린에 가게 된다면, 혹은 체코에 가게 된다면 드레스덴에 꼭 가보라고. 드레스덴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꽤 크고 유명하다고.
그러나 드레스덴은 베를린에서 편도로 3시간 거리에 있다. 지도만 보더라도 서울에서 못해도 경주까지의 거리다. 전날 베를린에서의 투어를 실패하고 드레스덴행을 알아봤다. 도저히 베를린의 이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눈을 비비며 터미널로 가는 길. 춥고, 비도 오고, 심지어 배까지 고프다. 일곱시 출발이었기 때문에 여섯 시 사십오분이 되자 거짓말같이 정류장엔 플릭스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표를 보여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키보드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문단 쓰지도 못해 나는 키보드를 가방 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으로 날아온 한 통의 메일.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가 취소됐어. 너 이제 베를린 못가.
아홉 시쯤 도착한 메일이었으므로 이미 나는 드레스덴에 한참이나 내려와 있었다. 순간 걱정이 됐다. 베를린에 다시 못 돌아간다고? 나는 오늘 짐을 아무것도 챙겨 오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플릭스버스는 자체적으로 티켓을 취소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 곳이었으니까. 문제는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거다.
바로 다음 티켓을 알아보는데 다시 메일이 왔다. 내 표가 다음 열차로 배치가 되었다는 거다. 시각은 원래 출발하기로 했던 3시보다 2시간 늦은 다섯 시. 걱정이 되어 표를 알아보니 1시 50분 버스표가 남아 있다. 바로 그 티켓을 이중으로 예매했다. 그때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베를린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땐 열 시쯤이었고, 2시 차를 타기까지는 약 4시간 남짓한 시각. 서둘러 강을 넘어 잼버 오페라하우스와 츠빙거궁전, 미술관과 레지던스 궁전을 둘러봤다. 인터넷으로 알아보길 드레스덴 마켓은 현지 휴무일이라고 했는데, 미술관에서 티켓을 사며 직원에게 드레스덴 마켓에 대해 슬쩍 물어보니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오늘 저녁 아홉 시까지 운영한다고 했다.
그날은 쉬지 않고 온종일 걸었던 것 같다. 드렌스덴은 궁전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지만 가장 유명한 건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드레스덴 마켓은 독일에서도 유명하지만, 크리스마스 때에만 되면 주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와인을 사면 머그컵을 받을 수 있는데, 돌려주고 보증금을 돌려받거나 아니면 기념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와인 대신 ‘칠드런 티(아마 포도주스를 끓인 게 아닐까 싶다)’를 홀짝이며 마켓을 둘러봤다.
파리와 런던,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의 마켓을 둘러보는 동안 사실 물욕이 큰 편은 아니기에 마켓이나 쇼핑 자체에 재미를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드레스덴의 마켓은 정말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고, 먹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중에 도넛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드레스덴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고. 혹시 전통 음식인가 싶어 물어보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린 듯 보이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어머니뻘의 직원에게 묻는다. 알 수 없는 독일어가 난무하던 가운데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내게 말해주던 아주머니.
“그.. 이게... 전통까지는 아니고.. 뭐, 이런 데 오면 하나쯤 먹어서 나쁠 게 없지.”
그러니까 양심적이었던 아주머니는 이 음식이 한국에서 ‘회오리감자’급 정도라고 설명했다.
“근데, 진짜 전통을 맛보고 싶다면, 저쪽에 가서 슈톨렌을 먹어봐요. 드레스덴에 오면 슈톨렌을 먹어야지. 마침, 크리스마스고, 마침 새해니까.“
바닐라 도넛과 소시지가 들어간 바게트 빵을 와앙 물고, 따뜻 달콤했던 칠드런 티까지 홀짝이며 고개를 돌리는데 나보다 어린 남자로 보이는 듯한 이가 슈톨렌을 잔뜩 늘어놓고 무어라무어라 쾌활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슈톨렌? 들어본 적이 있었다. 슈톨렌은 독일에서 유명한 빵 중 하나로, 설날에 먹는 떡국 같은 개념이다. 슈톨렌을 듣기만 했지, 실제로 비싸서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몇 번 더 마켓을 돌다 슈톨렌 가게로 갔다. 남자는 나를 보더니 슈톨렌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원조에요! 여기 이 금박 표시 보이죠?“
남자는 내게 눈을 찡긋하며, 몇 그램 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요량으로 이게 전통음식이 맞느냐고 물었고,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렇다고 했다.
드레스덴 마켓과 아우구스 마켓을 급하게 지나니 딱 맞게 도착한 정류장. 그런데 웬걸 휴대폰으로는 알림이 오지도 않았는데 무려 1시간 넘게 버스가 지연된다는 거다. 예상했지만 현실이 되니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더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실로 반가운 투어 하는 감정이 느껴졌는데,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뻔했던 것 같다. 그래도 표가 취소되지 않은 게 어디냐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제는, 내가 가진 티켓과 정류장에 써 있던 표기가 다르다는 거였다. 혹시 내가 잘못 왔나? 유명한 길치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줄 알고, 처음에 궁으로 가기 전에 출발지를 확인했는데, 막상 다르니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여자에게 내 표를 보여주며 물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그러게..’하며 자신과 나의 표가 다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불안했다. 나 오늘 베를린 못 가는 거 아니야? 벨를린이 불편해 떠나왔지만 막상 못 간다고 생각하니 별로인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안되겠다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옆에 노부부가 서 있었다. 그들도 여행객으로 보였는데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독일어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가 제가 있어야 하는 정류장이 맞나요? “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자신은 영어를 못한다며 아내에게 한 번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 표를 보더니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정류장과 제 티켓 표기가 다르죠? 할머니가 가진 티켓과 제 티켓에 쓰여 있는 표기도 다르고요! “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는 건 베를린 센트럴 스테이션이라 쓰여있는데,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표와 정류장의 전광판에는 베를린 ’ZOB'이라 쓰여 있다. 한참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ZOB'은 독일어로 ’센트럴 스테이션’이라는 뜻이란다. 그제야 다른 언어들도 다들 독일어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은 대부분의 언어가 자국의 언어로 표기되어 있다.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겨 자칫하면 내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오해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저 플릭스버스 처음 타 봐서 너무 불안했어요.“
”우리도 버스를 타고 이렇게 온 건 처음이라, 지연이 너무 심하네. 나쁜 버스!“
노부부와 나는 내가 가져온 사탕을 나눠 먹으며 잠자코 버스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점점 역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날 버스는 정확히 1시간 30분 늦게 도착했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온 시간도 늦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드레스덴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은 도시였다. 그날 나는 숙소로 돌아가 내게 드레스덴을 추천해 주었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좋았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 드레스덴의 매력을 몰랐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괴테는 드레스덴을 ’ 독일의 피렌체‘라고 부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내가 곧 가게 될 도시이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내가 경험한 드레스덴은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였고, 다시 시간이 흐르게 된다면 아마도 낭만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드레스덴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독일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음날은 서점을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자동차로도 유명하고, 장벽이나 건축물로도 유명하지만 예술로도 유명한 도시가 아닌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프라하로 빨리 넘어가버릴까 고민했지만, 이제 나는 베를린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