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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Dec 09. 2024

이해하다 보면, 사랑하게 되어 버려.

#18 베를린 (D+16)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가지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에 대해 은근한 차별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나의 차별은 ‘사랑의 정도의 크기‘다. 어떻게 노력해도 마음의 정이 붙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 사람을 더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에는 나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더 좌절을 크게 경험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때보단 성숙해진 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이 내게 그런 도시였다. 독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독일에 머무르면서 나는 좀체 이 고요하고, 침울한 정서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어떠한 소음도 허락되어 있지 않는 듯한 도시. 첫날 숙소 근처의 마켓에서 장을 보며 이곳은 어쩐지 일본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음날이 되니 일본의 정서를 뛰어넘어 ’어둡다‘, 거리가 너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해 마음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짓눌려 있는 듯한 느낌. 거리는 깔끔하고, 멋있었는데 숨을 쉬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빨리 이곳, 독일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상한 기운에 검색을 해보니, 베를린은 ‘다크투어리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나간 역사를 감추지 않는 도시. 부끄러움을 인정할 줄 아는 도시. 아픔을 전시할 줄 아는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었다.



숙소에서 조식을 챙겨 먹고, 그동안 미뤄뒀던 빨래도 해놓고 느지막이 나서는 길. 브란덴부르크 문과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보고 나니 마음은 조금 더 무겁다. 설상가상으로 모두의 추천으로 가보리고 한 드레스덴행 버스에 오류가 생겨 투어는커녕 근처의 카페에서 일을 해결하느라 애를 먹었다. 하늘은 푸르고, 사람들은 모두 생기가 있는데 도시는 조용하다. 얼마나 고요하느냐면 거리에 지하철이 조용히 흘러가는 바람 소리만이 들릴 정도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고요하다. 그래서 우울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최근에 보았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 때문에 구급차의 소음은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체크포인트. 판문점 역할을 했던 체크포인트 앞에는 거대한 트리가.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장벽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나는 이스트사이드갤러리로 넘어갔다. 공원처럼 조성된 갤러리를 한참 걷다 무기력함을 이기지 못하고 근처의 파이브가이즈에 들어가 3시간 정도 글을 썼던 것 같다. 몰아치던 일을 처리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오후 다섯 시. 창밖은 이미 해가 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날 나는 하루 동안 한 것이 겨우 기념물 몇 개 본 게 전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가장 기대했던 여행지의 첫 투어날에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았다니. 오래도록 이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보기보다 길을 가다 괜찮은 카페에 들어가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일찍 숙소로 들어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베를린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우울해서 놀랐다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다 곧 그 이유를 알아냈다.


‘베를린은 너무도 우리의 현실과 닮았어. 그래서 불편했던 건지도 몰라.’


베를린은 어떤 면에선 서울과 닮았고, 내가 돌아가야 하는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 우리가 우울했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 방을 함께 썼던 친구들은 내 또래였고, 나와 같이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되지 않아 가장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독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여행을 온 독일에선 더 큰 우울함이 있었던 거다.


드레스덴을 가려고 했던 건 예정에 없던 행선지였다. 첫째로 베를린에서 편도로만 약 3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하루 정도 일찍 체코로 넘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정도로 베를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좀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분.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작년 겨울, 첫인상에 얼굴을 마주하면 어쩐지 의견이 자꾸만 충돌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그가 내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적대적인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내 입장에서 사람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다. 처음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면서 나중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나 인상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를 겪은 이후로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해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나중에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게 베를린은 그 사람 같은 도시였다. 성향도, 성격도 첫인상도. 모든 게 그 사람 같았다. 지독한 자기통제광. 타인을 통제하려 하던 사람. 베를린이시내를 걷는 내내 그 사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번 더 이 도시를 이해해 보겠느냐고.


나는 베를린에 시간을 조금 더 두고, 그를 천천히 이해해 보기로 했다. 내가 베를린에 예정대로 머물게 된 건 그 이유였다.


나는 끝내 내게서 잘라내어 버린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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