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암스테르담~베를린 (D+15)
아침 일찍 호텔에서 채비를 해 공항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베를린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거리. 런던에서 에코백을 잔뜩 사모으느라 짐이 줄기는커녕 더 늘어나버렸다. 몇 가지의 옷을 버리고, 마침 세면용품도 다 떨어져 모두 버리고 출발하는 길. 어깨는 무겁고, 날씨는 흐리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지도를 보지 않아도 눈치껏 길을 잘 찾았다는 사실이다. 호텔 인포메이션 책자에는 여기서 버스를 타면 7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버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금방 도착해 나는 마지막으로 암스테르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공항에서부터는 일사천리로 모든 일정이 진행되었다. 첫째로 네덜란드 항공을 이용했기 때문에 공항에는 그 어느 항공사보다 크게 항공사의 카운터를 찾을 수 있었다(거의 한 터미널이 KLM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유럽 내 이동을 비행기로 처음 해보는 나로서는 직원에게 몇 번이고 경로를 물어봐야 했다.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던 직원들의 안내에 절차를 통과하고 통과해 도착한 공항 내부. 공항검색대를 통과해 게이트로 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여권 검사를 안 하는 거지? EU 내에서 여권검사를 안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비행기는 조금 더 공식적인 절차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하는데 여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스키폴 공항에선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니 바로 게이트가 나온다는 얘기다. 티켓에 적혀 있는 28번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앞은 여느 공항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여긴 여권 검사하는 곳이 없단 말이야?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모두들 피곤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은 유럽 전역에 비가 세차게 내려 많은 항공이 지연되었던 날이었기 떄문이다. 비행기 출발까지는 약 4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았고, 너무나 일찍 왔던 나는 공항 내 버거킹에 앉아 간단히 밥을 먹고 쉬었다.
그때 내가 앉은 자리의 맞은편으로 태극기와 익숙한 국기들이 보였다. 알고 봤더니 여권검사를 하는 게이트가 따로 있는 거다. 내가 출발하는 게이트는 따로 여권검사가 없는 창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공항은 공항검색대 이후에 게이트 내에서 여권검사 절차가 있는 것이라는 거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유럽 간 이동을 하기에 간단한 보안검사만 받았던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를 불안감에 나는 직원에게 가서 물었다. 나는 한국인인데,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게이트넘버는 28번이다, 나는 여권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느냐. 내 말에 직원은 표에 적혀 있는 게이트 넘버를 보더니 안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에 와서 생각해보건데, 세상에는 참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을 대기. 출발을 30분 정도 앞두고 지연과 동시에 게이트가 변경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메일과 문자메시지로도 안내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바로 옆 게이트로 허둥지둥 이동. 열려야 하는 게이트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계속해서 지연되었다. 베를린은 비교적 치안이 안전하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는 일정을 계산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도 헷갈리게 설계되어 있어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그때, 내 어깨를 두드리는 낯선 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국인이었고, 내게 게이트가 여기가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도 이곳이 처음이라 잘 모른다고 했고, 우리는 동시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담긴 그의 헤드폰에선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 역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애꿎은 비를 욕하며(?) 다녀온 나라들을 이야기했고, 나는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대륙, 아프리카와 미국을 궁금해했다. 마침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약 1시간 넘게 지연된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는 내게 굿럭-하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렇게 타게 된 비행기엔, 구역별로 줄을 설 때부터 동양인이 나밖에 없었다. 모든 방송이 영어로 나왔고, 모든 의사소통을 영어로 해야 했다. 국내 항공사만 이용했던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기내는 좁고, 높이 또한 낮았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좋던데, 모두들 꽉 끼어 자리에 착석했다. 내 옆에는 배가 진-짜 남산만 한 할아버지가 앉았다. 할아버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자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기내에서 미리 다운로드한 음악과 다음에 보내야 할 원고의 자료를 훑어보다 승무원의 지시를 (살기 위해) 꼼꼼하게 들었던 것 같다.
한참을 가다 하늘에서 올려다본 구름 속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마치 꿈결을 헤매고 있는 듯한 황홀함. 너무 아름다워서 그다음 날 똑같은 장면을 꿈꾸기도 했었다. 암스테르담이었는지, 베를린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구름 위를 거니고 있는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정말로 눈물이 났다는 거다.
온종일 몸이 긴장해 있어서일까 잠깐 잠에 빠져든 사이에 방송이 나왔다. 곧 베를린에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즐겨 듣던 태민 오빠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는 하늘 위에서 점점 베를린의 풍경이 바라보이는 것을 감상했다. 어느새 깜깜한 밤. 하늘 위에서 바라본 베를린의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너무나 멋스러웠다.
우버를 타고 숙소로 가는데, 내게 ‘헤이, mini!'라고 부르던 기사의 차 번호는 공교롭게도 1994. 내가 태어난 년도였고, 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은 이미 해가 져 근처의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쇼핑하는 것으로 하루를 매무리 했던 것 같다. 샴푸와 휴지 등을 사는데 문득 여기 살러 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여행을 하며 전과 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더 필요한 것, 본질적인 것을 구매하는 데 몰두해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마트 ’EDEKA'는 한국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같은 곳인 것 같다. 없는 게 없고, 심지어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독일에 온 첫인상은 일본과 닮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서, 분위기. 마트에서 느껴지는 모든 기운이 그랬고, 이후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어쩐지 일본의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독일은 내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던 중 가장 기대를 하고 있어 오래 머무는 곳이다. 만일 학교를 한국이 아닌 곳에서 가게 된다면 독일로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독일에 대해 생각하면 어쩐지 성숙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군더더기 없는 거리의 풍경들. 그러나 나는 다음날 하루빨리 베를린을 떠나고 싶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