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암스테르담~잔세스칸스 (D+14)
암스테르담에선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암스테르담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헤이그와 잔세스칸스도 매우 궁금했던 곳이었다. 잔세스칸스는 우리가 ‘네덜란드’하면 흔히 떠올리는 풍차마을이다. 이곳에선 방앗관과 염료공장 등이 즐비해 있다. 그러나 한국으로 친다면 ‘춘천’ 정도의 포지션이 아닐까 싶다.
전날 헤이그에서 만났던 사람 중 인상 깊었던 할머니가 있다. 마우리츠하이스에서 나와 스피노자 생가를 잠깐 둘러보고 암스테르담으로 내려가려는 길. 스피노자 동상 사진을 찍고 생가 앞에 와 섰는데 할머니 한 분이 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30분. 스피노자 생가는 현재 도서관 같은 서고로 꾸며져 있으며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만 개방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후 2시가 한참을 지났는데 무을 열어주질 않는 거다. 내가 그 앞에 서성이고 있으니 할머니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없어요.”
“네? 구글맵에는 오늘 영업을 한다고 하던데요?”
나는 할머니에게 내 지도를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지난주에도 이곳에 왔어요. 여길 오려고요. 그런데 문을 열어주질 않네요.“
헤엑? 여길 오려고요? 나는 이 콩알만한 건물을 보겠다고 찾아온 할머니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할머니는 브라질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조금 기다리며 노크를 하고,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들었다. 안에 누군가 재채기를 하는 소리를 말이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할머니와 눈을 맞추니 할머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내 말에 할머니가 안쪽을 째려봤다. 할머니는 내게 스피노자의 철학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사실 스피노자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한국인이고, 저 너머의 ‘이준열사기념관’을 방문하러 온 것이라고. 그리고 이제 그만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게 ‘굿럭’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잔세스칸스로 향했다. 오후에 미리 예매해 둔 반고흐 미술관에 가려면 암스테르담에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근교로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스프린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열차였다. 네덜란드는 정말 정응이 잘 되었던 도시다.
잔세스칸스로 오는 길에 보았던 작은 마을들의 풍경을 보는 것이 좋아 열차 안에서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평소였다면 한 편이라도 글을 썼을 텐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잔세스칸스에는 나와 몇 명의 사람들만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가게가 10시에 문을 열었는데, 우리는 9시에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러다 함께 걷게 된 한 일본인 언니. 우리는 마을로 향하는 큰 다리를 건너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길을 찾기도 했다. 언니는 교토에서 왔다고 했다. 이곳을 보기 위해 말이다. 다만 겨울이라 조금 아쉬웠다고.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풍차를 실제로 본 감상은 매우 신기했다. 진짜 동화 속 풍경이 연상되었다고나 할까. 멋있었다. 그리고 안데르센의 시선이 궁금해졌다. 그가 창작했던 동화 속 세계관이 단숨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코펜하겐이 궁금해졌다. 그곳에 있는 동안 암스테르담에서 한껏 들떠 있던 마음이 정적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치즈 공장도 둘러보고, 나막신 공장도 둘러보고 나오는 길. 근처 잔세스칸스 박물관에서 화장실도 이용하고, 커피 한 잔를 주문하고는 잠깐 앉아 일을 했다. 그날은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조금 있었다. 새롭게 시집이 나오는 날이었고, 새로 도전하게 된 플랫폼이 오픈된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긴장이 됐다. 그곳 카페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잠깐 숨을 돌리며 예정대로라면 잔세스칸스 뮤지엄을 둘러보려 했다. 뮤지엄에는 잔세스칸스의 풍속화와 볼만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그때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생리가 시작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데다 완죤 시골이었던 그곳은 근처에 편의점 하나 없었고, 그나마 마을에서 가까운 마켓은 달려가보니 문을 열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역 근처에 있는 것이 전부였고, 다시 박물관으로 오려면 오후 일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암스테르담까지. 고비라고 생각했던 여정들이 모두 끝나가서인가. 아니면 12월의 중요한 일정들이 끝나서인가.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피곤이 조금씩 몰려오고 컨디션은 점점 난조가 되어갔다. 할 수 없이 역 근처로 가 생리대를 구입했다. 잔세스칸스에서 다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열차는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되었고, 나는 역사 내의 카페에서 잠시 쉬며 숨을 돌렸다. 이상하게 전날 일찍 졸음이 몰려오더니. 그날 하루는 둘러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컨디션이 매우 좋지 못했다. 그래서 안네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식당에 들러 무려 15유로짜리 파스탈르 주문했다. 원래는 파스타와 물만 주문할 생각이었는데, 웬걸 잘생긴 청년 한 명이 오더니 나보고 갈릭 빵을 추천하고 싶단다. 심지어 7유로짜리. 다 못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잘생긴 미모에 알겠다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피자 만한 빵이 내 앞으로 도착. 조금 무리해 일정을 소화할까 하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몸을 조금 편안히 하며 쉬었던 것 같다. 오후엔 안네의 집의 외관을 지나쳐 숙소에서 잠시 쉬다 반고흐 미술관을 둘러보고 근처의 상점가를 둘러보다 다음날 베를린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실은 반고흐 미술관을 가기 전에 식은땀이 나고,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아 몇 번이고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인상주의 미술을 즐기지 않는 데다, 반고흐는 영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나는 발랄하거나 경쾌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냉소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날 오후 기대 없이 방문했던 미술관에서 나는 반고흐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와 그의 세계관이 퍽 이해가 되었다. 조금만 더 어릴 때 왔었다면 아마도 지루하고, 별로인 사람으로 기억했겠지. 지금까지 내게 반고흐는 별로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반고흐가 평단의 비난을 받았을 때에도 나는 그들의 시선이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반고흐는 현실을 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반고흐는 안주가 아닌 목격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편에 맞게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그는 대단하거나 화려한 모습을 포착하기보단 주변의 생기 있는 사람들의 멋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그림은 ‘아몬드나무‘. 조카가 태어났을 때 정신병원에서 그렸다는 그 나무는 환희 그 자체였다. 그날 내가 마주한 반고흐는 아마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느끼건대 INTJ형 인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제멋대로인 것 같구, 지독한 통제광들 같지만 실은 겁이 많고,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오랜 기간 ’뷔페‘의 그림을 좋아했다. 정교하게 딱 맞아떨어진 선.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산된 딱딱함. 냉소적임. 나는 냉소적인 세계가 좋고, 냉소를 옹호했다. 내가 아는 세계의 현실은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2024년을 통과하며 내 세게는 요즘 밝은 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듯하다. 반고흐가 그려낸 사물과 사람들은 그런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듯보이지만, 그는 시들어가는 해바라기를 그릴 때에도 밝고 경쾌한 색채를 사용한다. 그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폐장시간까지 남아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가가 되어야지. 되어버릴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숙소 근처에 애플 스토어가 있어 사고 싶었던 아이패드를 구경하고, 네덜란드의 전통 간식이라는 ’애플도넛‘을 먹으며 귀가했다. 그날은 숙소에서 오래된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나저나 할머니는 그날 스피노자 생가를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