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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Mar 22. 2019

방송국에서 만난 나의 캡틴, S

부치지 않을 편지 1

오랜만이에요. 벌써 우리가 못 본 지 1년이 훌쩍 넘었네요. 일 그만두고도 연락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때도 제말 들으시곤 "너 안 할 거야 아마"라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나요. 선배는 틀린 적이 없었다는 걸 또 한 번 증명한 셈이네요. 선배는 우리 중에 대장이었어요. 피디님이 있었으니까 왕 대장은 아니었지만 우리 에프디들끼리의 대장. 그땐 에프디 아니었더라도 우리 중에 대장이니까 그렇게 내 맘대로 부를게요.


선배를 처음 본 건 아마 제 면접 날이었을 거예요. 우리가 유리 감옥이라고 부르던 높은 건물을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올 것만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어요. 티브이에서만 보던 휴게 라운지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피디님과 함께 나타난 선배는 잘 웃고 세심해 보이는 사무직 여직원 같았어요. 나중에 보던 무섭거나 딱 부러지는 인상은 아니었어요. 


피디님이 왜 이런 학벌에 이런 일에 지원했냐고, 다들 며칠 못 버티고 나가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송곳 같은 질문을 던질 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할 때, 그 자리에서 선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어쨌든 저를 뽑아준 사람이니까, 저한테는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약 5개월간 회사생활을 맛보면서 세상의 쓴 맛도, 어두운 면도 너무나 처절하게 앓아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기억 속에서도 조금은 좋은 기억이라고 추억할만할 거리가 있어요. 떠올려보니 그 기억 속엔 선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기억은, 제게 '선배'의 개념을 정립해주었던 사건이에요. 온에어 전날, 그러니까 일주일 중 가장 싫은 날, 종편 전날 밤이었어요. 여느 때처럼 모든 선배들은 퇴근하고 막내가 남아 다음날 인서트에 쓸 파일 테이프를 내려야 하는 날이었지요. 그날따라 불안하게 깨끗하게 나와야 할 화면에 가편집 때 쓸 자막이 딸려 나왔어요. 아무리 다시 해봐도 결과는 똑같았지요. 그날따라 막내들만 다니는 인제스트실에 선배가 퇴근하기 전 인사하러 왔어요. 떡진 머리에 울 것만 같은 제 표정을 보고는 선배는 결국 제 테이프를 대신 내려줬고, 선배는 그 날을 '인사만 하고 갔어야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이미 아침부터 마스터 작업을 하느라, 본인 파트를 미리 편집해놓느라 힘들었을 텐데 후배를 위해 기꺼이 '내가 대신해줄게'라고 한 모습이 저는 당시에 너무 고마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라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다음 날 아침에 퇴근해 암막커튼도 없어 환한 자취방에서 잠이 들며 생각했습니다. 몇 년뒤 나도 꼭 후배를 위해 기꺼이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그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요.


두 번째 기억 역시 종편 날 아침이네요. 전쟁 같은 시절에 영웅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듯 그날 제게 영웅은 선배였어요. A, B 선배가 전날 먼저 퇴근해 다음 날 일찍 출근하면 제가 전날 늦게까지 있다 다음날 조금 늦게 출근하는 시스템이었잖아요. 그런데 A와 B선배의 퇴근은 조금씩 빨라졌고, 제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출근 시간은 똑같았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전 혼자 삭이고 있었어요. 이전까지도 말 많은 방송국에서 하나의 뒷얘기를 또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전 학보사 때도 그랬고, 동아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한 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
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
아름답게 아름답던 그 시절을 난 아파서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내가 너무나 싫어서
- 볼빨간 사춘기, 나의 사춘기에게 -


그럴 때 너무 힘들어서 친구에게 전화해서 엉엉 울기도 하고, 새벽에 찬바람 맞으며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아이처럼 볼빨간 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를 들으면서 안양천 다리를 건너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니까 '나 좀 알아봐 줘'라고 외치고 있었나 봐요. 근데 그런 마음의 소리를 읽기라도 한 듯, A 선배에게 선배는 말했죠. "왜 너희들 퇴근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얘 퇴근시간은 점점 느려지니? 다음 날 나오는 것도 얘만 그대로잖아. 얘 4시에 나오면 문제 생겨? 없으면 4시에 오라고 해." 무조건 제 편만 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때 그 말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필요치 않은 인력이 괜히 나오는 것은 낭비라는 것, 모두에게 형평성 맞는 일처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선배. 오늘따라 너무 그립습니다.


P.S 선배가 사회생활할 때 지켜야 할 사소한 것들부터 큰 팁들, 아직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떳떳하게 선배를 만나러 갈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멋진 모습으로 다시 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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