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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gonboy Oct 13. 2018

이직의 이유

나는 5년차 마케터이다. 졸업 직후 들어간 광고회사 AE로 1년, 그리고 지금 S회사에서 4년차 PM(Product Manager)으로 일하고 있다. S사는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를 갖고 있는 기업이자 최근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수제버거 브랜드를 한국으로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쯤이면 어디인지 알 것이다.) 요 근래 회사가 내외부적으로 꽤나 시끄러웠지만 남자로서는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회사이다. 눈 질끈 감고 버티면 40대 중후반~50대 초반까지는 부장 그리고 노력에 따라 임원급으로도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곳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2015년 S사 하반기 공채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또라이들로 가득 찼던 광고회사를 박차고 나와 10개월 만에 내가 바랬던 나름 대기업의 신입 공채로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고회사 재직 당시 만났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고, 내가 취업만 된다면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결혼 준비를 시작하기로 여자 친구와 얘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룹 신입사원 연수와 계열사 연수를 마친 후, 점장 생활을 짧게나마 경험하고 본사에 배치되었다. 이름하여 마케팅 본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본부장 두 번, 팀장 1번, 6명 팀원 중 5명이 바뀌었다. 팀에 배치된 첫날, 저녁 6시가 되자 팀 선임이 '진곤 씨, 출근 첫날인데 얼른 들어가요. 이렇게 칼퇴할 때는 지금밖에 없어'라며 날 퇴근시켜줄 때, 그 멘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지어 본부 직원들이 6시가 되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 기본 연봉에 매월 일정액의 연장근로수당이 포함되어 있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후 나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매일 7~8시에 퇴근할 때에는 고마웠고, 휴가 전 날에는 인수인계 자료 정리하고 업무 처리해 놓고 가느라 새벽 3시까지 야근한 적도 있다. 심지어 입사 첫 해 주어졌던 4박 5일의 여름휴가 중 하루도 쓰지 못했다.


이렇게 야근하고, 내 동기들 다 쓰는 그 4박 5일의 여름휴가도 쓰지 않고 일을 하니 '일 잘하는 진곤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이 '일 잘 하는'이라는 개념과 정의가 무엇인지 말이다. 물론 대략적으로는 말썽 피우지 않고, 고객과 유관부서에서 클레임 받지 않고, 시키는 일을 원하는 대로 데드라인에 맞추어 해오면 일을 잘 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휴가와 연차 쓰지 않고 회사에 희생하며, 그 사람을 찾을 때면 항상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전화나 카톡을 하면 항상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케팅본부에서 4년 차 PM으로 일하며 뒤돌아보니, 남은 것 없더라. 내가 배웠던 건 책임회피, 그리고 그를 위한 증거 보존방법(이메일, 메신저 대화 내용 등), 위에서 까라면 까기, 위에서 시키는 거를 하거나 하는 척 하기, 경영진이 원하는 제품과 일정에 맞는 제품 출시 및 프로모션 계획 등인 것 같다. 소위 말해 잔머리와 꼼수는 늘었고, 물 경력을 쌓은 것 같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특히나 나는 카톡에 다양한 분야의 마케터 약 100명이 모인 단톡방이 있는데 거기서 말하는 마케팅 툴, 마케팅 용어를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이 회사 와서 그런 툴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던 중, 마케팅으로 입사한 2명의 동기가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외국계 기업 취업사이트를 알려줬고, 그날 저녁 나는 당장 집에 와서 4년간 열어보지도 않았던 나의 'Career' 폴더를 열어 영문 CV를 폭풍 업데이트하기 시작한다. (이직 프로세스에 대한 스토리는 이다음 글에)


지금 이 회사는 위기에 봉착해있다는 시그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1.  비용절감을 이유로 미국, 중국 등에 파견되었던 주재원들을 현지 채용인원으로 대체하며 주재원들은 귀국을 통보받았다. 심지어 한국에서 차 팔고 집 팔고 번듯한 외국계 회사를 다니던 와이프가 회사까지 그만두며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지금 9개월 만에 돌아오게 생긴 차장님도 계시다.. 그 사이 집값이 얼마나 올랐고 쓴 비용이 얼마인데 거기에 대해서 회사의 보상은 0. 그리고 본사로 돌아와도 일할 자리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나는 인사팀에서 관리하고 있는 주재원 Pool에 들어가 있고, 이번 신입사원 공채에도 우리 회사에서는 처음으로 주재원 Pool로 관리하는 글로벌 전형을 진행한다. 하지만 내가 주재원 갈 확률은 가면 갈수록 희박해졌다.


2. 경영관리, 경영기획팀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여러 TFT를 구성하고, 돈을 써야 할 마케팅 부서의 예산이 1년 넘게 30%~50% 삭감 중이다. 우리 회사 TFT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우리 팀원 모두 비상근으로 2~3개씩은 기본으로 TFT에 소속되어 있다.


3. 내가 속해있는 브랜드의 비전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영업은 월말 목표치 맞추기 위해 물량 밀어 넣기에 바쁘고, 마케팅은 소위 마케팅이 아닌 물량 지원을 통해 추가 매출을 일으킨다. 그럼 월말에 물량을 넣었기 때문에 다음 달 초에는 다시 매출이 꼬꾸라 지고.. 매월 이런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러면 다시 매출 안 좋다고 대책안 세우라고 하고, 그 거창한 대책안 (행사 몇 가지) 세워서 보고하고 실행하면 내 할일을 다 한 것이다. 우리 회사는 잘 하는 것보다는 하고 안 하고 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마케팅 툴? 우리 브랜드 마케터들 중에 이 툴을 쓰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나는 이러한 이유로 이직을 맘먹었고, 구인 사이트들에 내 레쥬메들을 올린다. 그리고 다음날, 어느 헤드헌터를 통해 문자 하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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