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의 기억
우리 형은 나보다 일점 팔 센티 크다.
얼굴은 엄마 닮아서 나보다 작다.
뼈가 통뼈라 때리면 아프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릴 때 엄청 줘팼다.
형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고 싶냐?”
“디지게 맞고 한 대 더 맞을래?”
“넌 갔다 와서 봐!”
“야, 저리 안 꺼져!”
“니가 아직 덜 맞았지?”
때린 사람은 몰라도 맞은 사람은 다 기억한다.
고통은 그런 거시다. 그래도 내가 어디서 줘 터지고 오면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기도 했다. 내 동생은 나만 팰 수 있어 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학교에서 놀다가 시비가 붙었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한 학년 후배가 나를 몰라보고 개겼다. 옆에 있던 사촌의 같은 학년 짱이었다. 그런데 걔네 형은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나보다 2년 선배였다. 그런데 내겐 세 살 많은 형이 있었다. 형이 나타났다. 나이로나 학년으로나 형이 이기는 거였다.
형은 뭐든지 많이 먹었다.
안성탕면을 5개나 끓여 먹는 질풍노도의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회충이 많았는지 구충제도 맛있게 먹었다. 살이 통 찌질 않았다. 덕분에 체구가 작아서 밀리는 게 아닌가, 하-
그날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고 나서 형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형은 젊고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배운 게 교회밖에 없어서 중국으로 예수를 팔러 갔다. 자기 인생도 팔릴 뻔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형은 제주에서 꽤 살았다. 형이 있으니 종종 가겠구나 했지만 형제끼리 곰살맞게 잘 그러지 않았다. 남자끼리 특히나 말없이 그저 아프지 말고 잘 살길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형은 검찰총장하던 사람이 대통령 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인생을 팔러 떠난다. 이번에는 조카들 미래의 발걸음을 위해서다. 정치혐오 가득한 형은 그 새끼가 그 새끼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a) 새끼‘와 그(the) 새끼는 분명 다르다.
좌우지간
우리 형은 고스톱을 진짜 잘 쳤다.
무언가 치는 걸 잘했다. 자치기도 무척 잘했다.
오락실에서 50원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었다.
재주도 많고 재능도 많았다.
용감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오기가 넘쳤다.
나처럼 나약하지도 않았고 의리가 있었다.
고스톱판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나에게 깽값을 물곤 했다.
결혼하고서는 내게 사랑한다고도 말했다.(후후)
형이 로또가 돼서 멀리 떠나는 것 같다.
부디 이국땅에서 당첨금 많은 로또가 되어
이 동생에게 지난날 갚지 못한 깽값을 마저 물어주길. 가서 아프지 말고 맞지도 말고 말이 안 되면 한국말로 쌍욕을 박아서라도 지지 말길. 재외국인투표는 반드시 일하는 놈들로 뽑아주길. 이 땅에 사는 가족들 생각해서 내년 꼭 선거해 주길.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길 바래 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