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튀는 주방, 묻지 못한 안부.
이름도 없고 급여도 적고 야망은 과했고
그런 시절을 ‘직업’이라 부르기엔 좀 웃기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탄생’에 가까웠다.
– 직업의 탄생 시리즈 서문
점장이 외쳤다. 소리보다 먼저 날아다니는 건 땀방울이었다. “정우 형, 샐러드 좀 도와줘요!” 소테를 맡은 성구의 목소리도 따라붙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쪽에서 외침이 날아왔다. “기현아, 워크인에서 믹스 좀! 올 때 깔라마리 포션 1/4바트 있는 대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주방 밖, 미리는 숨을 길게 뱉었다.
“7번 손님 페쉐 컴플레인이요!”
“무슨 일이야?”
점장이 다그쳤다.
소스가 진하고 짜다는 말이었다.
“명옥아, 팬 좀 닦아줘— 빨리빨리!”
“10번 샐러드 언제 나와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한대요!” 홀매니저의 다급한 소리였다. 12시 47분. 점심의 폭풍은 빌지(주문표)를 헤치며 몰아쳤다. “25번 테이블 펜네 아라비아타 나간 거 맞아?” 내가 외치자 성구가 흠칫했다. “야, 비켜! 펜네 다시 데워!” 작은 체구의 점장이 팬을 잡을 때면, 그 모습은 거의 여전사였다. 주방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언제나 가장 센 사람이었다.
정희경 점장님.
경력 15년.
불 앞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사람.
“나가면서 음료 서비스로 드려!”
이내 다시 불호령이 터졌다.
“야, 너희 정신 안 차릴래?
자꾸 메뉴 놓칠 거야?!”
그때였다.
홀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미리가 샐러드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드레싱이 촉촉한 잎들 사이로, 애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짭조름하고 시큼한 소스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짧은 정적. 그리고 주저앉은 명옥이.
“오늘 무슨 날이야? 나 파스타 삶다가 죽을 뻔…”
기현이 투덜대자 성구가 말했다.
“아침에 믹스 제대로 안 봤어? 세니타이저 잘 풀었겠지?”
“당연히 했지. 몇 번이나.
손질하다 늦었다고 점장님한테 얼마나 혼났는데…”
기현은 머리를 감쌌다.
그의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명옥아, 괜찮아.
유기농이면 하루 이틀도 아니야.
쫄지 마. 점장님 화는 내가 풀어볼게.”
점심이 끝나고 직원 식사가 지나간 뒤였다. 애벌레 사건은 구청 위생과까지 흘러갔고 그 유기농 업체는 결국 바뀌었다. 계약서상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해관계니 뭐니 다 떠나 위생과 직원은 말했다. “다음에 또 있으면... 진짜 안 됩니다.” 그 이후 한 달에 한 번 불시에 점검이 들어왔다.
그곳은 남부터미널역 주상복합단지에 있는 ‘스파게티아’였다. 제과점을 그만두고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 있었다. 그러다 경력을 쌓아 다시 들어간 곳이었다. 하루 이백 명이 넘는 손님이 오가는 가게였다. 런치 타임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 속에서 명옥은 입사 한 달 만에 애벌레를 놓친 것이었다.
홀에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김미리.
일찍 결혼했고 아이가 있었다.
“민경이 학교 끝날 시간 아니야?”
“가게 앞으로 온대. 1층 스타벅스 가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가자. 너 쉬는 시간에도 책만 보잖아. 민경이가 삼촌 보고 싶대.” 미리의 딸 민경이는 나를 잘 따랐고, 나는 그 애를 많이 예뻐했다. 미리의 남편은 외도 이후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고 그녀의 고민은 내게 익숙해질 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지난번 말한 책이야. ‘자신감 – 안상헌’”
“너, 나한테 준 책만 열 권 넘는 거 알아?”
미리는 똑똑했다.
현실적이었고, 지금의 삶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주방 애들과 로또를 사며 얘기하곤 했다.
“일등 되면 미리 누나 주는 걸로.”
“진짜지? 그럼 너희들이 로또 꼭 일등되길.”
그건 농담이자 진심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꼈다.
미리의 사정이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고 미리의 결혼식이 열렸다.
우리는 다 같이 축가를 불렀다.
그 못된 민경 아빠도 거기 있었다.
“미리 친구, 김정우입니다.”
내 인사에 그는 묘한 눈으로 나를 오래 봤다. 그럴 만했다. 나는 미리의 고민을 밤새 듣기도 했고 민경이 아플 때 응급실도 같이 갔었다. 책을 빌려주고 말을 건네고 그냥 곁에 있어준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은 월드컵이 열리던 여름밤 회식이 있었다.
미리는 민경이를 데려왔다.
그날 성구가 말했다.
“우리 M.T. 가요.”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아냐. 미리가 할 줄 안대.”
“너 몰랐지? 이 누나 말이야,
이래 봬도 1종 보통 몰던 여자야.”
진짜였다.
미리는 운전을 잘했고,
그날 렌터카 카니발을 빌려 다 함께 떠났다.
차를 반납하는 건 미리와 내 몫이었다.
미리는 말했다.
“시간 좀 있으니까, 한강 갈래?
차에서… 데이트하고 싶었어.”
민경이는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다.
“정우야, 언제나 고마워.
네 덕분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아.
죽고 싶었는데…
애들이랑 일하면서, 나도 많이 좋아졌어.”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 말은 마치, 작별 인사 같았다.
“민경이 식장 들어갈 때 혼자면…
내가 같이 들어가 줄게.”
“야, 아직 애인데 벌써 결혼부터 걱정하냐?
참나, 너답다.”
그리고 우리의 청춘은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미리는 일을 그만뒀고 연락이 끊겼다. 몇 번의 문자와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도 그만뒀다. 그리고 우리 주방팀은 해체됐다. 청춘의 갈래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는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한 시절을 통째로 데우던 불꽃은 그렇게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