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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Feb 08. 2022

소설가의 에세이가 안  '불편한' 이유

소설가 김연수는 산문은 '싸구려'라 했지만 소설과 불편한 관계여야 할까

요즘도 오프라인 매장에서 음반 사모으는 걸 큰 낙으로 여기는 친구가 매일밤 대선 관련 유튜브 보는 재미에 빠졌다고 말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최근 방송 3사의 대선후보 토론회 합산 시청률이 무려 39%를 기록했는가 하면,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는 여야 진영에서 출간한 정치색을 띤 책들이 대선 여론조사 순위 경쟁하듯 상위권에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주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에서 1위에 오른 건 정치색과는 거리가 먼 소설책이었다. 소설가 김호연이 쓴 <불편한 편의점>이 갈 길 바쁜 정치권 신간들을 밀어내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이다. 유명 작가가 모처럼 펴낸 화제의 신간도 아닌, 작년 4월에 출간된 무명에 가까운 소설가의 중고 신작이 선전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불편한 편의점>은 기억을 잃고 노숙자로 전락한 한 중년 남성이 편의점 알바를 계기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삶을 회복해나가는 이야기다. 특히 소설의 중심 배경인 편의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인연을 맺은 인물 개개인의 이야기가 전체 스토리와 맞물리고, 마지막엔 베일에 싸인 주인공 독고씨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속도감있책장이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불편한 편의점>의 흥행 소식이 반가웠던 건 일종의 '팬심'이라 할 수 있다. 유명 작가도 아닌, 무명 시절부터 내가 응원했던 이의 진가를 비로소 세상이 알아보는구나 싶은 데서 오는 뿌듯함, 혹은 원석을 알아볼 줄 아는 나의 선구안에 대한 자기만족일 수도 있겠다.

과거 탤런트 장서희씨가 <인어 아가씨>란 드라마로 소위 빵 떴을 때,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할 수 없는 KBS 일요일 오전 드라마에 장씨가 극중 손지창-오연수 부부 집에 얹혀사는 친구 역할로 나올 때부터 눈여겨봤던 나의 안목에 뿌듯해했던 감정과 비슷하달까.


사실 팬이라고 하지만 <불편한 편의점> 이전에 그가 먼저 쓴 책 두어 권 읽어본 게 전부다. 한 권은 소설, 다른 한 권은 에세이다. 특히 처음 김호연이란 이름을 접하게 된 건 에세이 때문이었는데, 동네 도서관 신작 코너에 꽂혀 있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란 책 제목에 눈길이 끌려 빌려나오게 됐다.  



작가와 일면식도 없는 내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동네 형처럼 작가를 느끼고 응원하게 된 것은 에세이를 통해 작가의 개인사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매번 시나리오나 소설을 완성할 때마다 잘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단순히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니라 이번 작품이 잘 돼야 다음 작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계형 작가의 절박함이 에세이 전반에 묻어났다.


출판사 작가 소개에도 나오듯 김호연은 영화 시나리오 보조작가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소개글만 보면 막연히 같은 글쓰기니까 시나리오에서 소설로 영역을 넓혀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시나리오 작가에서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소설가로 이어지는 이같은 변화의 과정이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막막함 속에서도 비루하지 않게 현실을 단단히 버텨내는 내공을 쌓아갔음을 알 수 있다.


내게 시간이 있고 그 시간 동안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그 이야기만큼은 충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 하나의 이야기야말로 나만의 단단한 세계란 걸 깨달았다. 비록 팔리지 않더라도, 인기를 끌지 못하더라도, 쉽게 깨지지 않는, 내가 창조한 하나의 세계라는 믿음을 얻었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살아봐야 알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중에서



김호연의 소설에는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얘기가 종종 등장한다.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시나리오와 관련된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나름의 성공 공식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노력들이 영화가 아닌 소설을 통해 소화된 셈이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소설인 <고스트 라이터스>의 도입부는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이 소설에는 그가 에세이에서 언급한 실제 인물들이 롤 모델로 등장한다. 그중 선배 작가를 롤 모델로 한 캐릭터의 작법 지론은 곱씹어 볼만하다.


"재밌는 것도 웃기는 것도 다 필요 없다고."
"그럼 뭔데요?"
"궁금해야 돼."
"예?"
"궁금해야 된다고. 만화책 아무리 재밌어 봐. <무한도전> 하면 책 던져 버린다. 웹툰 아무리 웃겨 봐, 여친 카톡 오면 창 닫고 카톡질한다. 근데 궁금하면? 궁금하면 카톡 씹고 본다고. <무한도전>? 재방송으로 보고 만화책 붙잡는다. 핵심은 뭐야? 궁금할 것! 뭐든 이야기는 궁금해야 하는 거라고."


이처럼 작가가 젊은날 시나리오, 캐릭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은 <불편한 편의점>에도 등장한다.


캐릭터를 보여주려면 캐릭터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가느냐를 보여주면 된다. 독고 씨는 편의점 사장의 도움을 받아 서울역에서 나왔고, 사회에 재진입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불편한 편의점> 156P



소설가 김연수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소설은 산문 쓰는 노력의 10배 정도 든다"며 한때  "'산문은 싸구려고 소설이 명품인데, 왜 좋은 걸 좋다고 안 하실까' 하고 힘이 빠진 적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해당 인터뷰는 산문 나름의 매력을 긍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이 인터뷰를 접한 뒤 소설 대신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읽는 게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김연수는 당시 소설가가 쓴 소설과 에세이를 일종의 경쟁, 대체제 관계로 본 듯하다. 원작자 입장에서 소위 주력 상품이자 원가가 비싼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많이 팔리는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이해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작품을 세상에 던져놓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된다. 그렇더라도 독자 입장에선 궁금하기 마련이다. '왜 이런 얘기를 썼을까?' '이 에피소드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종종 소설 맨 끝에 짤막하게 따라붙는 작가 후기로는 부족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가 소설의 대체재가 될까 우려하는 마음에서인지 에세이를 질투했지만 독자 입장에서 소설가의 에세이는 소설의 대체제가 아닌, 소설과의 시너지를 높일 수 있는 보완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열렬하게 응원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한 에세이 때문이다. 이처럼 강한 유대감은 작가가 쓴 소설책을 모조리 섭렵한다고 해서 생겨나기 힘든 감정이다.



사족.

<불편한 편의점>에는 이경규씨가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가 등장한다. 하고 많은 예능 프로그램 중에 작가가 이 프로그램을 콕 찍어 등장시킨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개그맨 이경규씨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인 <망원동 브라더스>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판권을 사들인 인연이 있다. 그의 에세이엔 <한끼줍쇼>의 첫 촬영이 망원동이어서 이경규씨가 방송에서 망원동과의 인연을 언급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한끼줍쇼>가 가족, '식구'들의 행복과 훌륭하게 연결된다.


큰딸이 왜 청파동에는 <한끼줍쇼>가 안 나오냐며 온다면 우리 집에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강호동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5분 늦게 태어난 둘째는 자긴 이경규가 더 좋다며 돈키호테 복장을 한 이경규가 나오는 돈치킨 광고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런 날이면 아내도 치킨을 시키는 것을 눈감아주었고 아빠가 일찍 오면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자 딸들도 기뻐했다. 무엇에 기뻐했냐고? 치킨에? 아빠에?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함께 닭을 뜯으면 그게 가족이었다.                                                                                       

                                                                                                    <불편한 편의점> 129~1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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