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가정부의 헌신을 아름답게 묘사한 영화이다. 하지만 처음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찬사 할만한 여운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이 의도적으로 화면에 담아내는 미장센들-개똥, 개의 흉상, 영화관의 영화 장면, 옥상의 빨래, 자동차, 식당의 간판과 대형 물고기, 병원으로 가는 긴 터널 등 스토리와 조금 동떨어진 앵글은 몰입감을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제에서 '로마'는 계속 승승장구하였고, 그 원인에 대하여 궁금증이 극에 달하면서 영화의 배경지식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 의미 없이 나열되던 영상들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화'로마'의 주인공 클레오는 원주민이다.
클레오는 소위 최근 다른 영화에서처럼 얼굴이 이쁜 배우도 아니고 늘씬한 몸매의 주인공도 아니며 심지어 백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였다는 건 영화 속에서 멕시코에서의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클레오는 어린 20대 나이에도 유럽 중세시대의 하녀처럼 제일 먼저 일어나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식사를 챙기고 심지어 세 아이의 육아까지 맡아서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과도한 가사노동에 시달린다. 집주인은 함께 TV를 보는 것도 불편해하고, 식사도 따로 하게 하고, 잘못된 일들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긴다. 이렇게 하루 종일 집안일에 힘겨운 그녀에게 제공되는 안식처는 그저 침대 1개와 누우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크기의 바닥이 있는 쪽방이다. 그리고 집주인은 그 작은 쪽방을 밝히는 조그마한 전구에 들어가는 전기세마저 아까워한다. 거실에 아이들이 켜놓은 수많은 등불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멕시코에서의 원주민이란 어떤 존재인가?
감독은 영화에서 당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멕시코를 그대로 옮겨놓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의 1970년과 1971년의 멕시코를 보면서 당시 멕시코 원주민들의 삶을 잠깐 들여다볼 수 있다.
멕시코를 포함하여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것은 옥상에서 빨래하던 클레오가 부른 노랫말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모든 걸 갖고 싶지만 네게 다 주고 싶지만, 난 태생이 가난하기에 넌 날 사랑하지 않겠지” 멕시코에서 태생이 가난하다는 건 원주민으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가난과 천대와 굴종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기에 사랑마저도 태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의미다.
멕시코의 최상층에 위치하는 소수의 백인들이 대농장을 만들면서 1990년대까지 자영농민인 원주민들은 땅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노예처럼 농장의 일꾼으로서 일해야만 했다.
1970년에 소피아 가족이 방문한 바르세나 대농장에서처럼 백인들은 식탁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상 가득 차려 놓은 만찬을 즐기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원주민들은 가축들이 생활하는 지하창고 같은 조금만 움직여도 옆자리 사람의 잔을 치게 될 만큼 좁고 어두운 곳에서 겨우 파티를 한다.
또한, 지배계급인 백인들이 사격훈련장에서 했던 멘트처럼 백인들은 토지가 필요하면 멕시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약탈해 가기도 하고 빼앗긴 원주민들이 억울한 사정을 정부에 탄원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몽둥이와 철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르세나 대농장 앞에 늘어진 십자가들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원주민들의 희생물이다.
멕시코의 북부지역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 기본 농업정책보다 산업화에 중점을 두어 경제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나 남부지역은 대부분이 원주민들의 생활터전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토지를 가지고 어렵게 농업을 영위해가는 낙후된 지역이다. 영화의 중반에 클레오가 아이의 아빠 페르민을 찾아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물도 풍부하게 쓰지 못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못하다. 그들은 이러한 가난과 질병, 천대와 굴종의 삶을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서 백인 지배층의 하수인이 되어 같은 원주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가난이 만들어낸 아픔인 것이다.
남부지역뿐만 아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진 멕시코의 북부지역에서도 원주민의 삶은 그리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대농장주들에게 농지를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착취당하는 삶을 피해 도시로 빠져나온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클레오가 하는 일들처럼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정부나 가사도우미, 운전수 등과 같이 도시생활의 가장 밑바닥 인생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원주민들의 최선인 것이다.
멕시코는 1960년대 중남미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될 만큼 석유산업을 토대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경제성장의 내면에는 쉼 없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원주민들이 있었다. 클레오가 옥상에서 빨래를 하는 장면들을 들여다보자. 카메라는 옥상에 늘려있는 깨끗한 빨래들과 하수구에 버려진 축구공과 인형과 세제 거품들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감독은 현재의 발달한 멕시코의 산업발전 이면에는 원주민들의 짓밟힌 꿈과 희생이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고대문명인들
이런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원주민들도 1500년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는 멕시코의 주인으로서 중남미의 드넓은 고원지대에서 고대 잉카문명, 아즈텍 문명을 꽃피운 주역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 제국주의 확대를 위해 아메리카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500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원주민들의 사회적 지위는 순식간에 몰락한다. 유럽 약탈자들로부터 옮겨진 전염병의 전파속도는 약탈자들의 총칼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쓰러져 갔고 약탈자들이 강제노역을 위해 전염병에 강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왔을 때도 또 다른 홍역, 티푸스, 독감 같은 전염병에 노출되어 결국 3000만명 이상이었던 원주민들은 150만명정도만 겨우 살아남을 정도로 몰살한 것이다.
유럽 약탈자들은 이렇게 전염병 덕분에 손쉽게 원주민들을 점령하여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동물 같은 존재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고 유포시켰으며 유럽의 사상가들에 의해 원주민이란 게으르고, 무지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는 통념이 더욱 굳어지게 하였다.
백인 약탈자들은 원주민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으며 노동력 착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만 마니라 성적 학대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백인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태어난 새로운 인종을 메스티소 혹은 메스티소라고 하며 이들은 독립 이후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고 서서히 멕시코 사회의 엘리트층으로 성장하게 된다.
멕시코의 식민지 시대의 계층구조는 ①최상위에 유럽에서 직접 파견 나온 백인들과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크리오요) ②중간층에 메스티소(지배계급인 백인들에 의해 성착취를 당한 원주민이 낳은 혼혈인종)들이 있고 ③최하위층에는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있다.
그런데 독립 이후에도 원주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은 이유는?
1810년에 멕시코는 원주민들의 피를 대가로 300년간의 식민지 기간을 종식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삶은 식민지 시절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멕시코의 1810년의 독립이 원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들의 욕심 때문에 시작된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보내던 식량과 원자재들이 아까웠고 원주민들을 너무 가혹하게 하면 생산량이 저하된다는 취지에서 스페인 본국에서 정해놓은 간섭과 통제도 불편했었던 것이 이유이다. 그래서 결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멕시코는, 소수 지배 계급인 백인들의 사유물이 되었으며, 토지는 갈수록 그 소수에게 집중되어 대농장(라티푼디움)들을 형성했고, 원주민을 비롯한 민중들은 유럽 중세의 장원이나 다름이 없는 대농장의 날품팔이 일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메스티소의 괴로움
이렇게 백인들의 필요에 의해 독립된 멕시코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들이 만든 새로운 국가개념으로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래서 멕시코의 중간계층으로 성장한 메스티소 엘리트들에게 있어서 멕시코 탄생은 괴로움의 역사다. 메소티조는 약탈자 백인들의 성적 욕망에 의해 원주민들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피해자였으며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 속에서는 그들의 역사와 뿌리는 멕시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메스티소들은 그들의 뿌리를 찾고 소수 지배층의 독재정치 종식을 위해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원주민들에게 ‘빼앗긴 농지를 돌려준다’는 명목 하에 원주민들을 혁명에 동참시켜 결국 1910년에 혁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발발한 혁명은 소수 백인들에 의해 멕시코가 사유화되어가던 것을 피지배층끼리 함께 합심하여 지켜낸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혁명성공 후 1971년도의 원주민 삶은 왜 나아진 것이 없을까?
혁명에 성공한 이후 혁명을 이끌고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혁명지도자 '에밀리야 사빠따'가 권력을 잡을까 걱정하는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이후 집권층이 된 제도혁명당은 노동자, 농민, 학생 등을 모두 흡수한 당내부에 권력 자원을 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물론 그 권력 자원의 분배는 대단히 불균등하게 이루어졌고 석유산업 노동조합에게는 더 많은 국회의원 자리가 배정되었고, 가난한 원주민 농민들에게는 질이 아주 낮은 토지가 분배되어 혁명의 의미는 권력 야욕에 의해 퇴색되어 갔다.
이 제도혁명당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군인에게 풍선을 던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 시대처럼 1970년대까지 개발도상국으로서 경제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사회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된다. 외화차관을 통해 석유개발 및 산업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국가산업이 높은 성장곡선을 그리며 호황기를 이루었고 1968년에는 중남미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의 경제 저력을 보여준다.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높은 경제성장에 따른 급여를 쥐어주고 농민에게는 질이 낮아도 조금씩 분배하는 국영 농지를 분배함으로써 그다지 큰 문제없이 움직이는 시스템처럼 보였기 때문에 불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1971년 바르세나 대농장에서 원주민들이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원주민들의 토지 약탈과 독재는 서서히 중산계층 엘리트들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고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부의 불균등으로 인해 피지배 계급 사이에는 1910년대의 혁명이 산불처럼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생겨 났다 .
바르세나 대농장에서 산불은 이러한 시대적 염원을 표현하였다. 밤사이 농장에 산불이 나고 진화 후 맞이한 아침은 햇살이 가득 담긴 대자연의 모습이다. 침략자의 잔재를 태워버리고 난 듯 대자연만이 남겨진 이 아침산책에서 클레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고향에 온 것 같아요. 거기가 더 건조하지만 느낌이 참 비슷하네요..... 소리도 비슷하고, 냄새도 똑같아요
이렇게 조금씩 쌓인 멕시코 민중들의 분노는 1968년부터 혁명 같은 대정부 시위로 전개되었고 독재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우리나라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너무도 비슷한 정부의 민간대학살사건이었다. 1968년 뚤라델로꼬 광장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수많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탱크와 총으로 짓밟히는 사건이 발생했었고, 1971년의 '성체 축일 대학살'사건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폭력 전문조직을 이용하여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영화 속의 그 사건이 발생한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의 가슴속에서 무르익어가던 혁명의 열망은 몇 차례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에 의해 피로 얼룩져 실패로 끝을 맺는다. 신년을 기원하던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던 것처럼....
산불처럼 들고일어나는 시위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다.
클레오의 아이가 가지는 메타포는?
우리는 클레오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시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정부규탄시위를 진행하던 수많은 학생들은 정부의 지시로 투입된 무력진압대의 총과 폭력에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도망을 가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1910년에 성공했던 혁명과 같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고, 정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그들의 희망은 싹도 틔우지 못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죽은 연인을 안고서 울면서 소리치는 여인이 화면에 클로즈업 되면서 실패의 아픔과 고통의 절규가 메아리친다. 이후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후송된 클레오도 수술실에서 그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아이의 죽음을 안고서 슬퍼하며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뱃속의 아이는 이렇게 그동안 원주민들이 품어온 혁명을 꿈꾸는 희망의 메타포였고, 아이의 죽음은 혁명의 실패를 알리는 메타포가 된다.
멕시코의 원주민을 위한 투쟁으로 가는 길...
이렇게 멕시코 역사에서 1968년 뚤라델로꼬 학살과 1971년 시민 학살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시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의식 있는 중간계층 인텔리들이 제도혁명당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잘못 시위하다가는 총 맞아 죽기 쉬운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원주민들이 있는 정글로 숨어 들어가 게릴라 전술로 응대하겠다는 결심들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지배계층과 중산층, 최하위층으로 이루어져 있던 멕시코에서 산업화의 결과로써 번영을 누리던 중간 엘리트 계층이 최하위 계층인 원주민들과 공감하고 협력하여 조직적인 반정부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기존 갤럭시를 버리고 새로운 차량을 구입한 소피아는 아이를 사산하고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있는 클레오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소피아에게 갤럭시는 함께 동거하던 전남편을 의미하지만 조금 더 넓은 의미로 확대하면 소피아는 산업발전시대에 정부에 협조하여 동행해온 중산 인텔리 계층을, 팔아버린 갤럭시는 욕심이 많아져버린 독재정부를 암시한다.
감독은 팔아치운 갤럭시에 남편의 이미지를 입혀놓았으며 동시에 독재정부라는 메타포도 입혀놓았다. 첫 번째로 영화 초반에 바람난 남편이 집 주차장에 넣기에는 큰 갤럭시를 주차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차량의 라디에이터에 있는 엠블럼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왕관이 암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영화에서 개가 클레오의 손바닥을 핥는 장면이 딱 2번 나온다. 첫 번째는 바르세나 대농장에 도착해서 농장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원주민이 벽에 걸린 개의 흉상을 설명할 때와 소피아가 갤럭시를 팔고 나서 갤럭시와의 이별여행으로 툭스판을 함께 가자고 클레오에게 이야기했을 때이다.
1911년도에 죽은 개는 혁명이 일어나서 사임하게 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즈이며 1970년도에 앙심품은 원주민이 뿌린 농약 먹고 죽은 개는 1970년에 대통령에서 내려온 독재자 구스타포 디아즈 오르다스를 암시한다. 모두 악명 높은 독재정권이었다. 그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것처럼 소피아의 마음속에서도 독재정부의 이미지가 씌워진 남편을 지웠다는 설정인 것이다. 감독은 개가 클레오의 손바닥을 핥는 두 상황을 매치시켜서 갤럭시가 독재정부와 같은 메타포임을 암시하고 중산층 엘리트를 대변하는 소피아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원주민인 클레오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피아가 가족들에게 제안한 여행지(툭스판)에는 당시 멕시코 시민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다.
1968년과 1971년의 시민혁명이 실패하기 이전에 그 분위기를 조성한 몇 가지 국제 사건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단점들이 지적되던 시기에 마르크스 사상이 대안으로 등장하여 독재세력에 억눌려있던 나라들이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외치게 되었고 1954년에 멕시코의 이웃나라 쿠바에서 '체 게바라'가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마침내 쿠바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이 체 게바라가 혁명 전에 멕시코로 망명한 동안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고 82명의 동지들을 모아서 1956년에 툭스판에서부터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를 향해 떠난다. 아마도 체 게바라는 쿠바로 출항 전에 툭스판에서 82명의 동지들에게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소피아가 툭스판 식당에서 아이들과 클레오에게 한 것과 똑같이...
"앞으로 변화가 좀 있겠지만 우리는 함께 할 거야. 새로운 모험을 다 같이 하는 거야! 우리는 서로 뭉쳐야 해... 정말 가까이..."
마침내 정부에 원주민의 권리를 주장하다
1994년 멕시코에서는 검은색 복면을 한 사람들이 지방 소도시에 나타나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인근 6개 마을을 점령했다고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00명 규모의 무장 게릴라의 형식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엉성하다. 무장 게릴리라고 하였는데 총을 가지고 있는 게릴라는 많지 않고 총도 자세히 보니 나무로 만든 것 같고 나머지는 농기구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었다. 멕시코에서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는 원주민들의 문화의 독자성과 자치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열악한 원주민의 생활환경과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지방권력의 제거, 토지문제를 비롯한 경제, 사회정의의 실현을 법률적이고 제도적으로 확보하려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무장 게릴라 사파띠스따의 부사령관이라는'마르꼬스'는 원주민이 아닌 피부가 하얀 백인이다.
1968년도와 1971년도의 반정부 시위의 실패 후, 정글로 들어가서 독재정부와 전쟁을 벌이던 인텔리들 중 백인'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앞세우고 1910년 멕시코 혁명지도자 '사빠따'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사빠띠스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조직이 있었다. 이 사빠띠스따들도 정글로 찾아들어간 여느 인텔리들처럼 원주민들과 함께 총칼 들고 게릴라 전술로 싸우면 언젠가는 쿠바의 체 게바라처럼 혁명에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삶 속에 뛰어들어 같이 생활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생각이 많은 차이가 있음을 현실에서 깨닫게 된다. 문맹에 가까운 농민들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과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자기 부족의 언어를 구사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인텔리들은 처음에는 이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글 속에서의 22년의 비밀 투쟁기간은 무장 게릴라 혁명을 희망한 이들을 원주민 민중의 삶 속에서 원주민 대변자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겪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22년의 정글 속 비밀 투쟁시기의 주변 정세는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91년 소련의 몰락, 94년 쿠바의 뗏목 탈출 등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세계의 공산화를 이끌었던 공산체제의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게릴라 혁명은 더 이상 의미가 퇴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71년간 경제성장을 이끌어오면서 독재를 휘두르던 제도혁명당 체제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에 원주민들과의 공감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들이 정부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처음부터 멕시코시티로 진격할 만한 군사적 수단은 미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1994년 사빠띠스따들은 '무장봉기'라는 타이틀로 멕시코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이후 실제 전투보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한 담론 투쟁을 펼치는 대단한 전략을 사용하여 정치조직으로서 활동의 형태를 넓혀간다. 멕시코 시민사회는 이러한 사빠띠스따 원주민들의 요구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모든 결정을 원주민 마을과의 합의를 통해서 확정 지었고, 지속적으로 치아빠스 마을 외부에 존재하는 멕시코 시민사회와 소통, 멕시코 외부의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운동집단, 북미와 유럽의 시민사회 등의 국제 시민사회와 지속적으로 소통을 진행하여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늘날 사빠띠스따들이 요구하는 헌법개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빠띠스따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치아빠스 정글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자치권을 인정하는 형태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의 삶을 온전히 실행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치아파스 정글이다.
멕시코의 백인들의 역사와 달리 원주민들의 역사는 고대 찬란한 문명의 역사가 가려진 고난과 슬픔의 역사다. 식민지 시기부터 500년 넘게 그 천대와 멸시의 대우를 받고 착취당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스페인은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대하였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럽의 사상가들을 동원하여 학대 정황을 삭제하기도 하며 미화시키기도 하였다. 사실 소수의 지배계급들에게 있어서 원주민들은 독립 이후부터 경제발전에 저해되는 존재, 마치 소피아의 집 곳곳에 싸놓은 개똥처럼 천대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원주민의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인식하고 원주민들의 삶에 공감을 하고 존중하는 중산층 인텔리들의 등장은 실의에 빠진 클레오의 심정을 이해하고 새로운 여행을 제안하는 소피아의 존재처럼 희망이었고 등불이었다.
공감대가 형성된 클레오와 소피아가 옆결혼식장에서의 신랑, 신부와 같은 존재라고 큰 집게와 작은 집게로 가리키고 있다. 영화는 원주민들이 어떤 처우를 받아 왔는지, 멕시코의 멸시받고 천대받는 제일 밑바닥 인생인 원주민들이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을 만나서 함께 생활하며 그들만의 자치지역을 이루고 있는 그 옛날 고대사회에서처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살아가는 멕시코의 역사를 클레오와 소피아라는 두 계층의 주인공들의 공감을 통해서 훌륭하게 그려나간다.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원주민의 바닥인생에서 독재정부의 욕심과 같은 거품, 사회제도를 걷어내고 옥상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장면처럼 원주민이 멕시코 사회 일원으로 인정받는 계층의 상승에 관련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 곳곳에는 독재정부들의 부패와 혁명과 공감에 대한 미장센들이 넘쳐난다.
참고로 그중 몇 장면들을 언급하자면 클레오가 남자 친구와 같이 영화관에서 관람한 영화는 '파리 대탈출'인데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영국군 비행사를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계층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페인트공이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공감하고 협력하여 독일에 대항해서 임무를 무사히 마친다는 내용이다. 세 사람이 손잡고 웃으며 기뻐하는 장면이 오랫동안 화면에 노출된다.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영화 '우주 탈출' 또한 서로 다른 처지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우주를 탈출한다는 주제를 보여준다. 그래서 바르세나 대농장에서 산불이 나기 직전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응시하는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감독은 이영화를 오롯이 멕시코인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해 촬영팀 전원을 멕시코 출신으로 꾸렸고, 스페인어와 원주민어로만 대사를 구성했다. 또 배우들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캐스팅했다. 소피아 역의 마리나 데 타비라를 제외한 모든 배우는 연기가 처음인 신인이다. 촬영은 본래 쿠아론의 단짝인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제작 기간이 길어지며 루베즈키가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아예 감독이 직접 촬영에 나섰다. 멕시코 출신이 아닌 촬영감독은 영화를 100%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직접 카메라까지 잡은 이유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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