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자 클 수 없습니다. 생물적 발육이나 심리적 발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가능한 일인 교육적 성장을 혼자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필요하고 학생은 스승이 필요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런저런 만남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모든 성장은 ‘함께’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학 사전에는 ‘함께’라는 말을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죠. 이것은 시공간 속에서 사람 사이(인간)의 모든 일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께’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정겹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삶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죠. 아닌 게 아니라 ‘함께’라는 말은 가족, 이웃, 공동체 등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의 쓰임이 언제부터인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족은 1인 가족이 대세가 되면서 복수의 의미보다 단수로 쓰이게 되고, 이웃은 층간 소음을 주는 타인이 되어 버렸고, 공동체는 사라지고 커뮤니티로 대체되었습니다. ‘함께’라는 말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적 성장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하였습니다. 멀리서 친구가 오면 얼마나 즐겁겠느냐 이런 뜻이죠. 그런데 그 멀리서 오는 친구가 단순히 술 한잔하러 오는 그런 친구일까요? 물론 술 한잔하러 오는 친구도 좋지만, 공자가 반기는 친구는 뜻이 같은 사람, 즉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반기는 것이겠죠. 교육적 성장은 혼자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오늘날 교육은 학습자의 권리가 우선시되는 소위 학습자 중심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이전은 무슨 시대인가요? 주입식, 설명식, 획일식이라고 대표되는 교수자 중심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학습자 중심으로 무게의 중심이 옮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있으면 ‘주변’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중심을 강조한 만큼 주변에서는 소외가 발생합니다. 학습자의 배움이 중심에 있을 때, 교육에서 또 다른 소외가 발생합니다. 학습자의 배움도 중요하지만 교수자의 가르침 또한 중요합니다. 함께 크는 삶을 위해서는 학습에서 교육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학습에서 교육으로 방향 전환은 학습과 교수의 배타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학습과 교수, 학습자와 교수자 모두 교육의 주체로써 정당하게 참여하는 교육을 의미합니다. 교수와 학습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풀어나갈 예정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미천한 지식으로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 가늠이 잘 되지 않습니다. 다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습은 혼자서 할 수 있지만, 교육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을 키우기 위한 교육은 교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