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우산
며칠 후, 다시 비가 내렸다. 잔잔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도시를 덮으며 차가운 공기를 감쌌다. 이수는 출근길에 우산을 챙겼다. 그날 도현이 건넨 우산이었다. 낯선 사람의 따뜻한 호의가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우산을 펼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일찍 퇴근했다. 회사의 늦은 회식 대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선택한 이수는 근처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은 비 덕분에 고요했고, 빗소리가 나무 사이를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빗속을 바라보던 이수는 가까운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작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누군가 우산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었다. 그녀의 어깨는 젖어 있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에 든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우산 없이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소녀는 고개를 들어 이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가운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공허했다.
“상관없어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이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도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산을 나눈다는 건 단순한 행동이 아니야.’ 그녀는 우산을 펼쳐 소녀 위로 씌워주었다.
“여기서라도 우산 아래로 들어오세요. 젖은 채로 있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소녀는 잠시 이수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이수는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렇게 혼자 비를 맞고 있는 걸 보면, 뭔가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이랑 싸웠어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요.”
이수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 오는 날, 도현이 건넸던 작은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깨달았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저도 예전에 집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요,”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그럴 때마다 비 오는 날이 더 싫었어요. 하지만 그때 누군가 우산을 나눠줬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더라고요.”
소녀는 이수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작게 말했다.
“그 사람, 좋은 분이네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에게 가르쳐준 건, 우리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였어요.”
소녀는 조용히 우산 아래에 머물렀다. 그녀의 어깨는 조금씩 편안해 보였고, 빗속의 차가움도 어느새 사라진 듯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이수에게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이수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안도했다. 그녀는 소녀에게 우산을 건네며 말했다.
“이 우산은 이제 당신 거예요. 다음에 비 오는 날, 누군가에게 나눠줄 기회가 생기면 꼭 그렇게 해보세요.”
소녀는 우산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우산을 나눠줄게요.”
그날, 이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작은 호의와 진심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비는 여전히 차갑게 내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다음 에피소드 예고: “커피 향 속의 우산”
이수는 회사 동료 수민과 우연히 비 오는 날의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