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물일곱 살 때, 두 번째 남자 친구와의 서툰 만남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확히 말하면 찍힌 것이다. 볼썽사납게 차였으니 말이다. 시간을 갖자는 말이, 그 의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다음날 일 때문에 혜화동으로 향하던 길에서도 나는 얼떨떨했다.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잖아.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연락하겠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즐겨 듣던 팟캐스트 방송을 틀었다. 강신주는 그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행복한 상태가 디폴트라는 착각을 하죠. 하지만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잠시나마 우리를 고통의 바다에서 꺼내어 행복하게 해 준 인연들을 고마워해야 해요.' 그걸 듣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내가 다시 고통의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거구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은 2012년 그때 강신주의 강의에서 들었던 것의 연장선상이다. 여전히 강신주는 고통에 집중하고 있고, 그의 엄격한 사랑관은 무결을 요구한다. 그는 사랑이 곧 불가에서 말하는 자비라고 했다. 자비의 산스크리트어 어원, '마이트리-카루나'의 뜻은 '동등한 관계에서 타인의 고통을 아파한다.'이다. 사랑은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고, 그것은 반드시 행동 즉 노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 반드시 상대의 고통이 덜어질 만큼의(한 공기의) 사랑을 주어야 하며, 그 이상을 강요하거나 대가를 바라게 되면 즉시 사랑은 퇴색된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이런 것일까? 아니, 어머니는 물론이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보상심리가 없기는 어렵다. 대체 이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부처나 가능할 법한 구도자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 때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다. 둘 다 베푸는 사랑과 그에 수반되는 노동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같지만, 에리히 프롬은 '나' 스스로가 자아도취적 자아상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강신주는 철저히 상대만을 위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의 6강에서는 항상 모든 선택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좋고 싫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아가페적인 사랑을 기꺼워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범속한 나에게는 까마득한 경지로다.
다시 돌아가서 내가 스물일곱 살 때, 두 번째 남자 친구에게 차인 후 얼마 뒤, 자취방에 놀러 온 남동생이 여자 친구하고 싸운 이야기를 했다. 사연인즉슨 다른 여자에게 흔들렸던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더니 여자 친구가 화를 냈다는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걸 수용해줘야 하는 것 아냐?" 동생이 그런 말을 내뱉었을 때 기가 막혀서 어디서 그런 걸 배웠냐고 물어봤다. 강신주였다. 그때 강신주가 어떤 신드롬을 일으켰나 보다. 아니면 우리의 어리숙한 이상주의적 핏줄이 그곳으로 귀결되게 만들었거나.
강신주는 이렇게 위험하다. 그의 사유는 매력적이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설득력을 더한다. 아마 그로 인해 헤어진 커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재미있는 만큼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의 말대로 완벽한 사랑을 하고 이별의 때가 오면, 잠시나마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상대를 감사하며 기꺼이 보내준다고 치자. 그게 옳다고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