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주변이 별로 없는 할아버지는 오늘도 무언가를 계속 읽고, 본인의 컴퓨터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파일을 정리한다. 파일을 못 찾겠다거나, 이상한 팝업창이 떳다면서 도움을 요청할 때 할아버지의 파일들을 슬쩍 보면 대충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거의 90%이상은 성경에 대한 내용이다. 스스로 성경공부를 하시는 자료들도 있고,
교회 성경공부 모임의 자료들도 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빠지지 않고 정장을 차려입고선 교회에 가신다.
반면 나는 그냥 외출 나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복장으로 교회에 간다. 내 노트북에는 그런 성경에 대한 자료들도 없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와 나는 5명의 가족 중 단 2명 뿐인 크리스찬이다.
할아버지의 입원 생활 동안, 나는 참 많은 기도를 했다. 응급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지럽고 울렁거리는 멀미를 참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를 했다.
할아버지가 검사를 받을 때마다 결과를 기다리며 또 기도를 했다.
제일 중요한 심장시술을 받을 때엔 더 길게 기도를 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할아버지가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 핸드폰을 갑자기 나에게 내미셨다.
돋보기를 집에서 가지고 오지 않았다며, 핸드폰에 울리는 카톡 몇 개를 읽어달라 하셨다.
어..사실 나도 궁금했던 터라 잘됬다 싶었다. 할아버지는 누구한테 어떤 카톡들을 받으실까.
빨간색 점들을 하나씩 열어서 읽어 드렸다. 대부분 교회에서 온 연락들이었다.
목사님을 비롯해 여러 교인들이 할아버지의 쾌차를 응원하며, 기도하겠다고 그들의 마음을 담아서 보낸 메시지들. 면회도 안되는 터라 할아버지껜 아마도 그런 연락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않았을까.
주변의 응원을 메시지나 전화로 받으며 할배와 나, 우리는 고비를 잘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보호자로 있으면서 할아버지 침대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왜일까..? 내가 못 봤던 것일까? 설마..
입원 전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은 할아버지, 병실에서 둘이 있다 보면 가끔 어색해지는 시간이 온다. 그렇다고 각자 핸드폰만 보긴 싫었다. 이참에 궁금했던 점을 냅다 물어봤다.
“할아버지, 중요한 시술이 내일이잖아요. 목사님도 기도해주신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는 기도했어요?”
“응~”
“저는 할아버지 기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
“아~ 마음속으로 하셨구나! 맞죠?”
“응~ 그럼~”
꼭 해야 한다거나, 많이 할수록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이제 2년 정도 교회 다닌 것에 비해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성경말씀을 가지고 살던 세월이 거의 내 나이만큼이다. 생각이 어리숙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기도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봐왔던 할아버지의 독실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말이지, 그렇게 보이는 데로 이해하고 믿고 살아온 인생인 것 같다. 보지 못하는 것 까지 이해하긴 여간 쉽지 않은 법. 그래서일까 처음 본 것에 대해서는 특히 어려움을 느낀다. 마치 처음 해보는 병원에서의 보호자 생활처럼 말이다.
때때로 기분좋을 때는, 내가 이해한 대로 이 세상이 흘러간다고 느껴질 때이다. 가령 예상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난 다던가 기대했던 좋은 결과가 있다던가. 우리 할배가 시술을 마치고 길지 않은 회복기간을 거쳤다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도 있고, 실망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것 아닐까. 말수가 많지 않은 할아버지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많은 세상이 있다는걸 나에게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할아버지께 듣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다.
그 이야기를 통해 그를 더 이해하고 내 세상도, 나도 더 상장해가지 않을까.
우리가족은 아직 더 이대로 지내야 한다.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