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만든 나는, 해결할 것 없이 살 줄 몰랐다
벌써 6개월이 흘렀지만, 그녀를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이쯤이면 나 또한 그녀 못지않은 집착쟁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감정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이제 다 끝났어. 이제 나만 잘 하면 돼. 훨훨 날아다닐 거야. 두고 봐."
이렇게 말하며 다녔던 내 나날들은 어디로 갔을까.
명절에 만날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나 자신을 처량히 여기며, 나는 가을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그녀가 만들고 삼십년 넘게 그 안에서 날 고스란히 키워왔던
엄마의 그 감옥.
그걸 벗어난 지난 6개월은
도파민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독립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내 자신을 특별히 여기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건 다르다.
독립과 동시에 연을 끊었으니까.
탈옥수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매순간 나를 휘감았다.
사실 감옥 밖 세상은 하나하나가 나에겐 도전이었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쉽게 성공했다. 도파민과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일상은 점점 평안을 찾아갔다.
감옥 안에서 못 했던 것들을 원 없이 했다.
입고 싶은 옷을 사 입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인 의식주에서 그 무엇 하나 내 뜻이 없었으니,
하나씩 내 뜻대로 펼쳐가는 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했을까.
일상의 특별함이었던 나날들이 곧 나에게 평온한 일상이 되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일상이 평온해지자, 다른 것들을 해결하고 싶었다.
제일 쉽게 눈에 들어온 것은 회사생활이었다.
회사에서의 동료들 간의 사이. 이 사이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뭔들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뭐라도 해결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럴 자신도 있었고.
그치만 인간관계라는 건 말이지, 답이 없는 것 아니던가.
내가 엄마와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도 30년이 걸렸는데, 뭘 해결하겠다고 그리도 나섰는지.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지낸 지 1, 2주 만에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끌어쓸 도파민도 없었고, 일상은 일상대로 빡빡했으며, 건강은 챙길 시간도 없었다
그 와중에 인간관계는 그것대로 계속해서 우당탕탕이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끼니를 거를 수는 없어서 거의 요기만 달래는 정도의 밥을 먹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에서야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살기 위해서.
지금도 아직 회복이 완전히 되지는 못했다.
해결하지도 못할 것에 용감하게 덤벼든 그 벌을
아직도 받는 중인 것 같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일상 속 에피소드일 수도 있지만,
그간 심리적으로 얼마나 약해져 있었던가를 또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작은 것에도 이리 쉽게 자기 확신을 잃어버리는 '나'이다.
이 모든 걸 나는 또 그녀를 탓하고 싶다.
그녀의 나르시스트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가정교육으로,
뭐라도 그녀를 위해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날들 속에 자라온 나.
이 역시 그녀의 작품이 아닐까.
내가 대기업에 들어가고, 동생이 공기업에 들어가고.
"애를 하나 더 낳을 걸 그랬다."
그 말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다들 하나둘씩 독립을 준비할 때에
나는 성인이 되어 내가 신용이라는 게 생기는 것, 그것을 '그녀'가 기대했다.
카드와 대출이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녀는 그것이 그녀의 계획이고, 계획이 잘 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고,
그것이 엄마라는 그녀의 흐뭇함이었다.
10대 시절, 어떻게 하면 엄마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그런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았던 나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요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해준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어떠한 "요구"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곳엔 order와 carrying out만 있었을 뿐.
그래서 나는 평온이 두렵다.
해결할 것이 없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명령이 없으면, 나는 누구인가.
그녀가 만든 이 작품은, 아직도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나보다.
수행이 없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아직도 자신이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