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 Oct 29. 2018

죄를 고백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소심한 내 이야기

나는 보통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적당한 사춘기를 보냈고, 적당한 흑역사도 갖고 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조각 또한 갖고 있다.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내가 누군가에게 말로써, 글로써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 이름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분의 새침한 얼굴도, 다소 특이했던 걸음걸이도, 호탕한 웃음소리도 기억한다. 조용한 동네, 낡고 오래된 학교에서 가장 생기 있어 보이는 친구였다. 당시 나는 한창 외모에 민감했다. 밋밋한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화장으로 애써 어른 티를 내고 싶어 했던 사춘기 여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녀의 훤칠한 키와, 상큼하면서도 달달한 분위기가 부러웠다. 한 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고, 서로 안면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친구의 이름과 반까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교에서 이쁘기로 유명했다(내 기억으론,,,).


photo by. Unsplash.com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사춘기 시절의 나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익숙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여겼다. 누군가를 향한 부러움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부러움의 대상을 억지로 깎아내리고 상처를 줬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남을 상처 입혔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여러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남을 향한 칼날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왔다. 순간의 실수로 인해, 나는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친구들을 잃게 됐다. 인과응보니까, 당연했다. 만약 나에게 그 칼날이 겨눠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글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어떤 글은 누군가를 다시 일어서게도 하지만, 어떤 글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줄리언 반스의『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작품은 내게 위와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소설은 1960년대, 고등학교에서 만난 네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그의 패거리 친구 앨릭스, 콜린, 그리고 총명한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세 소년은 에이드리언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독특한 시각을 눈여겨보고 그를 아낀다. 이후 네 소년이 대학생이 되고, 토니는 베로니카와 교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계급적 격차를 느끼고 위축감을 느낀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그녀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라는 묘한 충고를 듣기도 한다. 결국 토니와 베로니카는 서로 맞지 않아 헤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토니는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에이드리언의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토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를 보낸다. 그 후 머지않아 친구 앨릭스에게서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토니는 충격에 빠진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채 40년이 세월이 흐르면서, 1부는 끝난다.


2부로 들어가보자. 토니는 어느 새 60대 노인이 됐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아내와는 이혼한 채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토니에게 어느 날,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포드 부인에게서 느닷없이 유언장 한 통이 날아온다. 그녀의 유언장에는 500파운드의 현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기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때부터 토니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어째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포드 부인이 갖고 있었으며, 그녀는 왜 그것을 토니에게 남겼는지, 그리고 500파운드의 의미는 무엇인지. 토니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베로니카에게 연락하고, 40년 전 자신이 보냈던 편지 한 통과 함께 거대한 비극에 마주하게 된다.


photo by. Unsplash.com

이 책은 호불호가 굉장히 심한 책이다. 나와 함께 독서모임을 했던 사람들은 물론, 많은 분들은 이 책이 '불호'였다고 한다. 반면에 나는 이 책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이렇게 글로 남기기까지 했으니, 내게 있어서 이 책은 '호'인 것이 틀림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라기 보다는, 앞으로 오래 기억할 것 같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나 또한 주인공과 같은 짓을 한 게 아닐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만큼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학적 힘을 잘 보여주었다. 그 힘은 무척 잔혹하고도 강렬해서, 나로 하여금 절로 죄책감을 갖게 할 정도였다.


사랑도 타이밍이지만, 사과도 타이밍이다. 책 속의 주인공 토니는 타이밍을 놓쳤다. 그의 40년 전 기억 또한 왜곡되어버렸다. 그 시절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사과할 엄두조차 나질 않는 상황 속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엄연히 가해자인 내가 40년 후에, 어쩌면 벌써부터 이 기억을 왜곡시키진 않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남긴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고, 그녀를 향한 나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는 방관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