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ive Dec 28. 2021

마녀 ‘율율’은 고민 상담 중

- 뿔논병아리, 폴과 재키

"자! 조용조용!! 어제 동작에 이어서 오늘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거에요. 시작 전에 스트레칭부터 할게요. 온몸을 쭈욱 늘려주세요.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혀주고, 두 날개를 활짝 펼쳐볼게요." 

갈대로 울타리를 이룬 이곳 호숫가에는 여러 마리의 뿔논병아리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그 동작들이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뒤에서 슬쩍슬쩍 따라해 보았다. 하지만 그 무리들 중에서 생김새도 다르고 뿔논병아리들을 내려다볼 만큼 혼자 우뚝 서 있는 나는 당연히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거기! 뒤에 누구죠?" 

"아! 안녕하세요. 저는 마녀 율율이라고 합니다." 


내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웅성웅성 거리더니, 순식간에 뿔논병아리들이 내 주위를 애워쌌다. 많은 눈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는 누구와 눈을 마주쳐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였다. 맨 앞에서 설명을 하던 뿔논병아리. 그러니까 선생님으로 보이는 뿔논병아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녀? 마녀가 우리 학교에는 무슨 일이죠?" 

"아.. 혹시 선생님이신가요?" 

"맞아요. 멜리사라고 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안녕하세요. 멜리사 선생님.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멜리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해야 할 말의 순서들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있었다. 

"어... 저는 말이죠. 이번에 졸업을 한 율율이라고 하는데요."

"네. 율율 씨!" 

"제가 여기 온 건... 그러니까.. 누구였더라? 아, 맞다! 폴!! 폴을 만나러 왔는데요. 폴은 어디에 있죠?" 

"폴? 우리 반에 폴이라는 학생이 있었나?" 

멜리사는 두리번거리며 폴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확히 '폴'의 얼굴을 모르는 듯 했다. 

"푸하하하하! 선생님. 폴이요. 폴!! 여기 있잖아요. 안 보이세요? 하긴. 워낙 작아서 잘 안 보이셨겠네요." 

뿔논병아리 무리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커 보이는 녀석이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다른 뿔논병아리들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몸집을 가진 뿔논병아리가 보였다. 그 녀석이 내가 찾던 폴이 분명했다. 나는 폴을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웠지만, 내 기분과 달리 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야! 뭐해? 마녀 님이 너를 찾아오셨다잖아. 인사 안 드려?" 

아까부터 폴을 보며 비웃던 덩치 큰 녀석이 이번에는 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앞으로 밀어냈다. 그 바람에 폴은 앞으로 떠밀려 나왔고, 이제는 내가 아닌 폴의 주위를 다른 뿔논병아리들이 애워싸기 시작했다.  

"폴! 언제부터 마녀와 알고 지낸 거야? 왜? 소원이라도 빌었냐? 키 좀 늘려달라고?" 

"늘려도 한참을 늘려야 할 텐데?"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덩치 큰 녀석과 그 옆에 얍삽하게 보이는 녀석이 폴에 대해 한마디씩 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뿔논병아리들은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어댔다. 그 탓에 폴의 고개는 점점 땅으로 박히고 있었다. 

"조용조용!!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해요. 마녀 율율이라고 했나요? 폴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아... 그게요."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후회가 됐다. 내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고개만 숙이고 있던 폴이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으니까. 

"이렇게 다 있는데 오면 어떡해요! 너무해!!!" 

폴은 나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눈물을 훔치며 무리를 벗어나 뛰어나갔다. 아무래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폴!! 어디 가는 거니? 폴!! 어서 돌아오지 못해?" 

당황한 멜리사는 폴의 이름을 부르다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그런 멜리사 선생님도 걱정됐지만, 그보다 폴을 따라가는 게 더 먼저였다.  


"멜리사 선생님! 죄송해요!!!" 

나는 얼른 사과를 드리고 폴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어디로 가버렸는지 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키만한 갈대숲을 손으로 헤치며 찾아다녔지만, 나는 금방 지치고 말았다. 

"폴... 대체 어딜 간 거야! 폴!!! 어디 있니? 폴!!" 

그때였다. 내 행동이 답답해 보였는지, 빗자루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맞다. 위에서 찾으면 훨씬 더 쉽겠네!" 

나는 폴짝 빗자루 위에 올라탔다. 빗자루는 이런 나를 보며 퓽- 하고 한숨을 한번 쉬더니, 곧장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어디 보자. 폴이 분명 여기로 뛰어갔는데..." 

키가 큰 갈대숲 사이에서 몸집이 작은 폴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작정하고 숨어버렸으니, 더더욱 애를 먹었다. 

"하필이면 바람도 불지 않네. 바람이라도 불면 찾기가 좀 더 쉬울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건지, 갑자기 빗자루가 속도를 올려 갈대숲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 덕에 하늘 높이 솟아있던 갈대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을 눕혔고, 그 순간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던 폴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곧장 폴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폴! 여기 있었구나!!" 

폴의 눈에는 여전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 눈으로 나를 한번 쏘아본 폴은 다시 고개를 양 날개 사이로 파 묻었다.   

"폴.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 난 널 빨리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에."

"도와주겠다는 마녀가 친구들이 다 있는 데서 나를 찾으면 어떡해요? 다른 말로 둘러댈 수도 있었잖아요. 이제 재키는 나를 더 놀릴 거에요."

"아! 아까 그 덩치 큰 녀석의 이름이 재키니?"

"맞아요. 실은 재키와 저는 단짝 친구였어요. 둘도 없는 사이였죠. 그런데 키 차이가 나면서부터 재키가 저를 점점 멀리하더니, 이젠 제가 화풀이 대상이에요. 화가 날 때마다 저에게 풀죠." 

"맙소사. 정말 못됐네? 그냥 둬선 안 되겠는 걸? 혼내줘야겠어!" 

나는 으드득으드득 손가락을 꺾으며, 씩씩댔다. 그러자 폴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말렸다. 

"아니요. 저는 재키와 다시 잘 지내고 싶어요. 예전처럼요. 같이 파자마 파티도 하고, 밤새 수다도 떨고 싶고, 재키와 같이 하트 춤 연습도 하고 싶고요." 

"맞아! 하트 춤! 연습은 잘 되고 있어?"

"아니요. 맨 뒤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동작이 보일 리가 없죠. 다른 애들 뒷모습만 보면서 대충 따라 하고는 있는데, 사실 정확한 동작을 배우지는 못했어요. 늘 애들 뒤에 가려져 있어서..." 

"하... 그럼 맨 앞으로 나가면 되잖아?"

"맨 앞은 재키가 있어요. 좋은 자리는 언제나 재키 차지에요. 우리 반 아이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덩치가 크니까 그 누구도 불만을 말하지 못하는구나."

"맞아요. 모두 재키를 무서워해요. 그러면서도 따르죠.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너처럼?" 

"외톨이요. 혼자가 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잖아요." 

"하... 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거지? 너희 둘의 관계 말야. 어릴 적에는 친했다면서." 

"저도 모르겠어요. 재키랑 대화하려고 하면, '야! 난 너랑 할 말 없어! 비켜!!' 이러거든요."

"풉- 너 방금 재키 목소리 흉내 낸 거야? 정말 잘하는데?"

"멜리사 선생님도 따라 할 수 있어요. '자! 조용조용! 거기 떠드는 애 누구니?'"

"우아! 진짜 잘한다. 성대모사의 달인인데?"

"성대모사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잘 따라 하는 걸 성대모사라고 하거든!"

"정말 쓸데없는 재주죠."

"쓸데없다고? 무슨 소리! 방금 난 너의 성대모사 때문에 크게 웃었는걸? 누군가를 웃게 하는 건, 엄청난 재주야! 멋진 능력이라고." 


폴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런 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분명 폴의 성대모사는 큰 장점이자 매력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학생이 이렇게 수업시간에 딴짓해도 되겠어? 자! 일어나!"

"잠시만요!! 율율, 제가 상담소에 편지를 쓴 이유는 딱 하나에요. 재키와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요."

"폴! 혹시.. 재키 말고 다른 친구와 사귀어보는 건 어때?"

"다른 친구도 좋지만, 저하고 많은 추억을 공유했던 재키와 다시 잘 지내보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율율! 마법을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재키의 마음이 착해지거나,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게 하는 마법? 뭐 그런 걸 말하는 거니?"

"네네! 맞아요. 그런 마법이요. 율율은 가능하죠?"

"아니! 난 못해." 

"뭐라고요? 못한다고요? 왜요? 마녀잖아요!" 

"맞아. 우리는 마녀야. 그래서 마냥 착하지 않지. 마법의 힘을 쓰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해."

"대가요? 치를게요. 뭘 드리면 될까요?" 

"폴.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해.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어. 사랑의 묘약을 만들 때면, 난 언제나 실패했거든. 실패의 원인은 간단해. 상대방의 소중한 것을 얻지 못했으니까. 아니, 얻고 싶지 않았으니까. 소중한 건 말 그대로 소중한 거야. 마법의 힘으로 그보다 더 대단한 걸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소중한 건 지켜야 하는 거야." 

"하. 망했네. 설마 모든 마녀들이 다 율율 같아요?"

"아니. 보통은 마법을 썼겠지.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아. 마법이라고 해도 영원한 건 없다는 뜻이야. 알겠니?" 

"휴... 그럼 율율은 뭘 도와줄 수 있는데요?"

"음... 그건 차차 생각해보자!"

"뭐라고요?"

"일단 학교로 돌아가자!!" 

작가의 이전글 마녀 ‘율율’은 고민 상담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