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프란
그리스에는 사람들의 병을 잘 고치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로커스'
이른 아침이면 산에서 약초를 캤고, 잠들기 전까지는 쉴 새 없이 아픈 자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몸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휴식이 간절했던 크로커스는 딱 하루만 온전히 자신을 위해 쉬기로 하고,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다리를 다쳤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치료해주고 오느라 온천에 도착하고 나니 이미 하늘은 자주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라도 이렇게 쉴 수 있는 것에 크로커스는 만족했다.
서둘러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갔고, 이내 노곤해지면서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온천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나무향기 또한 크로커스의 몸과 마음을 개운하게 만들어주었다.
크로커스는 눈을 감고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넉넉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져,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거기, 누구 있나요?"
크로커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온천의 끄트머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누군가 숨어있는 게 분명했다.
"숨지 말고 나오세요. 혹시 저를 찾아, 여기까지 오신건가요?"
크로커스는 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닐까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마을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어느 여인이었다.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쥐며 온천 수면위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아..... 먼저 와 계신 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산에서 종종 약초를 캐기 때문에, 얼마 전 이곳에 온천이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내내 쉬지를 못하다가 오늘 시간이 나서 오게 됐습니다."
"설명 안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겠어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제 이름은 크로커스라고 합니다."
"저는 리즈라고 해요."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말들이 오고갔지만,
그 대화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고 알아갔다.
"할 이야기가 아직 더 남았는데, 리즈! 우리 내일도 여기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처럼 하늘이 붉게 물들때, 그 때 만나기로 해요."
사랑이라는 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소리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크로커스는 리즈를 보자마자 한 순간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병을 고쳐달라는 환자들이 줄을 섰지만 크로커스는 피곤함도 잊게 됐다.
하루 종일 미소가 떠나질 않았고, 밥을 먹다가도 히죽히죽 바보처럼 웃기도 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리즈가 사는 곳까지 마차로 1시간은 족히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주 먼 거리도 아니었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딱 중간거리인 '온천'이 비밀스럽게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리즈, 오늘도 나가는거니? 해가 질 때마다 대체 어딜 가는거니?"
"요새 뭘 먹고 나면 소화가 잘 안되서요.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몸가짐을 잘 해야한다."
"엄마... 그 약혼식 말인데요. 다시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이미 다 끝난 얘기잖니!"
"사실 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어디 가문 사람이고, 누구의 아들인지 정도만 알 뿐이에요.
그가 뭘 좋아하는지, 버릇은 뭔지, 언제 가장 행복한지...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아마 그 사람도 저에 대해서 모를걸요."
"그거야 약혼식부터 올리고 차차 알아가면 되는거지. 뭐가 걱정이니?"
"엄마...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약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하는 거잖아요."
"리즈! 그쪽 집안과 혼약을 맺기로 한 건,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거야.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니? 너 혹시..."
"맞아요. 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요.
지금 그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거에요!"
리즈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부모의 말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부모가 원하는
상으로 눈치껏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랬던 리즈가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모습에 그녀의 엄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쏟아내야 할 말이 많은 나머지, 순서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리즈를 가리키던 손가락만 바들바들 떨릴 뿐이었다. 리즈는 차분하게 엄마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장은 크로커스가
보고 싶었다.
"엄마! 미안해요!!"
리즈는 그 길로 달려나갔다.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가 엄마의 품을 떠나 창공으로 비상하듯, 엄마의 곁을
벗어나 저 멀리 달려가는, 어쩌면 도망가는 리즈의 뒷모습을 그녀의 엄마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든 건, 톡 하고 발등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서둘러 리즈의 뒤를 쫓았다.
"리즈에게 말타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어... 가르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을 타고 리즈의 뒤를 쫓으면서도 그녀의 엄마는 자꾸만 중얼거렸다. 아직은 아니었다. 리즈를 자신의
품 속에서 떠나보내는 건 아직이라고 생각했다. 리즈는 여전히 새장 안에 있어야 할 작고 여린 새여야했다.
자신이 계획한대로 말하고 움직여야 했다. 리즈의 마음과 생각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어야 했다.
"리즈. 지금 넌 덫에 걸린거야. 엄마가 얼른 빼내 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리즈가 도착한 곳은 얼마 전 휴가 차 방문했던, 바로 그 온천이었다. 이곳은 리즈의 엄마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리즈의 엄마는 멀찌감치 떨어져 리즈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리즈! 와줬군요. 안오는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크로커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요."
"괜찮아요. 이렇게 와줬으니까."
리즈는 어쩌다가 저런 남자와 눈이 맞은걸까. 저게 과연 사랑일까. 리즈의 엄마는 꼭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당장이라도 떼어놓고 싶었다. 리즈의 손목을 낚아채서, 당장 자신의 품에 데려오고 싶었다.
가슴 속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쳤고, 자신이 잘 다져놓은 길이 아닌 외딴길을 걷는 리즈가 마냥 밉기도 했다.
리즈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라고. 사방이 걸려 넘어질 돌부리 뿐이라고.
하지만 일단은 물러서기로 했다. 리즈의 엄마는 이를 갈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리즈를 다시 내 품에 가둬둘 수 있는 기회. 그 순간을.
약혼자가 있었지만, 크로커스를 사랑하게 된 리즈는 그와의 밀회가 마냥 짜릿하고 행복했다.
크로커스 또한 리즈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걸 듣게 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짜 사랑은 우리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둘은 몰랐다. 둘 사이 인연의 끈이 새장 안에 갇힌 어린 새처럼, 한없이 나약하고 가늘어서
바람만 불어도 툭 끊어질 불안함 투성이었다는 것을.
"엄마!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 열어주세요."
"리즈, 네가 뭘 잘못했는지 시인하기 전까지는 난 절대 그 문을 열어줄 수가 없단다."
어렸을 때부터 리즈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엄마는 리즈를 방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엄마가 아끼던 꽃을 다 꺾어버리거나, 책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접거나, 숲을 돌아다니던 토끼를 몰래
키우거나. 이럴 때마다 리즈는 길어봤자 하룻밤 정도 방에 갇히곤 했다.
"엄마... 이번에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이게 왜 잘못인지 모르겠어요.
엄마. 저는 크로커스가 좋아요. 그 사람을 사랑해요..."
하지만 굳게 잠긴 문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크로커스는 홀로 온천을 지키며 애타게 리즈를 기다렸다. 칠일 째 되는 밤.
크로커스는 여전히 리즈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리즈! 당신이군요! 어디있나요?"
크로커스는 두리번 거리며 리즈를 찾았다. 하지만 크로커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리즈가 아닌,
그녀의 엄마였다.
"멀리서 볼 때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당신은 우리 딸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군요."
"리즈의 어머니신가요? 리즈는 지금 어디있나요?"
"리즈에게 약혼할 남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나요?"
두 사람은 서로 원하는 질문만 정신없이 던져댔다. 그 탓에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서늘하고 무거웠다.
"약혼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즈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리즈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네요. 이제 앞으로 내 딸이 당신을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 문제없이 약혼식을
올릴거고, 그 남자와 행복하게 살테니까요."
"리즈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만나게 해 주세요!"
"허!"
리즈의 엄마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무 뒤에 있던 장정 두 사람이 크로커스를 붙잡고
흠씬 그를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코의 혈관이 터지고, 왼쪽 눈이 부풀어 올랐지만 크로커스는 목놓아 리즈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적막이 찾아왔을 땐, 만신창이가 된 크로커스만 바닥에 홀로 엎어져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그 때 어디선가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비둘기를 보고 크로커스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날 위로해주려고 온거니..? 괜찮으니까 어서 날아가렴."
크로커스는 겨우 몸을 일으켜 손을 휘적거리며 비둘기를 쫓으려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비둘기는
크로커스의 주위를 맴돌며 날아가질 않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 비둘기를 가만히 쳐다보던 크로커스는 비둘기 발목에 작은 편지가 묶여 있다는 걸 보게 됐다.
"너는 편지를 전해주는 전서비둘기구나."
크로커스는 발목에 묶인 편지를 얼른 펼쳐보았다.
"당신의 사랑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크로커스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건 '신'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크로커스는 리즈에게 편지를 썼다.
'리즈, 잘 지내나요? 난 잘 있어요. 비록 당장은 만날 수 없지만, 난 매일 당신을 생각해요.
종이가 작아서 더는 못쓰겠네요. 부디 당신에게 잘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크로커스는 편지에 입을 맞추고, 비둘기의 발목에 묶어 날려보냈다. 비둘기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쉼 없이 날아간 비둘기는 리즈의 방 창문을 톡톡 두들겼다.
몇날 며칠 방 안에만 갇혀있던 리즈는 우연히 날아온 비둘기가 마냥 신기하고 귀여웠다.
리즈는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았다.
"고마워. 네 덕분에 웃게되네. 그런데...이게 뭐지?"
발목에 묶인 편지를 발견한 리즈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어보았다.
"크로커스!!!"
비둘기를 보며 생글생글 웃어대던 리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웃다가 울다가 한참을 반복했다.
'크로커스. 당신에게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나도 매일 당신을 생각해요.
사흘 뒤에 내 약혼식이 있어요. 그날 난 당신에게 달려갈 거에요. 비둘기가 당신이 있는 곳을 안내하겠죠.'
답장을 받은 크로커스는 역시나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편지를 전해주는 비둘기가 마냥 고맙고
기특했다. 많은 내용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이 변함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리즈의 약혼식 날. 리즈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눈부셨다.
"리즈, 진작 엄마 말대로 이렇게 했다면, 난 너를 가둬두지도 않았을거야.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한다는 거
알고 있지? 예쁘구나 우리딸."
리즈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집 앞 정원에는 약혼식에 초대받은 손님들로 북적였고, 리즈의 약혼남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느라 리즈와는 눈 한번 마주치지를 못했다. 리즈는 크로커스에게 날려보낸 비둘기가
어서 빨리 날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불안과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눈동자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순간 비둘기가 숲에서부터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지금이야!! 나를 크로커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줘!"
리즈를 향해 날아오던 비둘기는 곧바로 방향을 바꿨다. 리즈는 드레스 끝을 한손으로 올려잡고,
머리 위를 날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힘껏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가면 크로커스가 준비해둔 말이 있다고 했으니까, 힘내자!"
리즈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 누구도 리즈가 도망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즈는 더욱 힘을 냈다. 저 앞에 크로커스가 미리 준비해둔 말이 보였다.
나무에 묶여 있는 그 말은 리즈가 입고 있는 드레스처럼 하얀 백마였다.
"됐어. 이제 됐어. 크로커스, 조금만 기다려요."
리즈는 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앞발을 하늘 높이 치솟은 말은 리즈의 다급한 마음에 응답하듯,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때 바람 사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나무에 꽂혔다.
화살이었다. 누군가 리즈의 뒤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리즈는 뒤를 돌아다봤지만, 활을 쏘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리즈는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내리치며 더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런데 그 때였다.
무언가가 자신의 등을 내리꽂더니 순식간에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화살을 맞은 리즈는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땅 위로 떨어진 리즈는 심장박동수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로커스를 만난다는 생각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었는데...
쿵...쿵...쿵.....
소리가 점점 아득해지고, 주륵 흐른 눈물로 눈가가 뿌옇게 변했다.
쓰러진 리즈를 일으켜세운 건, 다름아닌 리즈의 엄마였다.
"리즈!!!! 안돼.. 리즈!!!!!"
리즈를 뒤쫓아오며 화살을 쏜 건, 리즈의 엄마였다. 전서비둘기를 통해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걸 알게 된
그녀의 엄마는 숲으로 도망치는 리즈와 길을 안내하는 비둘기를 보고,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크로커스에게 날아가는 그 비둘기를 화살로 쏘아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화살이 리즈의 심장을 뚫을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리즈의 심장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솟구쳤다. 리즈의 엄마는 어떻게든 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리즈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리즈의 입에서는 크로커스의 이름만 들려왔다.
엄마는 그런 리즈를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통곡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게 다 크로커스 때문이야!!"
싸늘하게 눈을 감은 리즈를 바라보며, 그녀의 엄마는 이 모든 원인이 크로커스라고 생각했다.
독기 서린 눈으로 다시 말에 올라탄 리즈의 엄마는 말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달리고 또 달리다보니, 저 멀리 크로커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리즈의 엄마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크로커스의 심장을 향해 활을 겨눴다.
화살은 그대로 뻗어나가 크로커스의 심장을 내리꽂았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피할틈도 없었던 크로커스는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맥없이 쓰러졌고, 그의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는 흥건하게 땅을 적셨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지만, 크로커스는 마지막 힘을 다해 리즈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리즈... 리즈....."
간신히 연결돼 있던 두 사람 인연의 끈은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크로커스와 리즈의 사랑을 바랐던 신은 두 사람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며 꽃으로 피어나게 만들었다.
그 향이 진하고 황홀해서 아무리 먼 거리에 있더라도 꽃의 존재가 느껴질 수 있도록...
<후회없는 청춘>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사프란'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