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지워져도

- 해바라기

by Olive

바다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투명하게 푸른빛을 띄며 청량함을 과시했지만,

밤이 되면 누구든 집어 삼킬것처럼 검은빛을 내며 철썩거렸다.

밝은면도 어두운면도 기쁨도 아픔도 모두 끌어안아야 했던 바다의 신에게는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딸이 있었다. 언니의 이름은 '그리디', 동생의 이름은 '우고시아'였다.

낮과 밤이 있고, 태양과 달이 있듯이 둘은 서로의 다름을 채워주며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리디와 우고시아는 바다를 벗어나, 연못 가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을 가장 기다렸다.

단 해가 진 후부터 동이 트기 전까지만 놀 수 있었다.


"우고시아, 왜 멍하니 앉아있어? 곧 해가 뜰지 몰라. 빨리 놀자"

"언니, 언니는 만약 우리가 동시에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

"음... 글쎄. 그런데 우리 마음만큼 상대의 마음도 중요하지 않을까?"

"상대의 마음?"

"우리가 똑같이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면, 다음은 그 남자의 몫이겠지. 그가 선택할거야.

자신이 더 사랑하는 사람을."

"그럼 언니는 그 남자의 선택을 그대로 인정할거야?"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어쩌겠어. 인정하고 존중해야지. 그런데 뭐야? 우고시아,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냥.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난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어."

"우고시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리 없으니까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얼른 놀자!"


그리디와 우고시아는 달빛이 점점 물러나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그 순간

동쪽하늘에서 황금으로 뒤덮인, 이글거리는 전차를 타고 내려오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언니!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볼 수가 없어. 전차를 타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구야?"

"태양신. 아폴론이야. 지금 그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어."

"뭐? 아폴론? 언니 빨리 도망치자."

"잠깐만. 겁먹을 거 없어. 그가 우리를 보며 웃고 있으니까."

"웃고 있다고?"


우고시아는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언니의 말에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태양신 아폴론은 정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디와 우고시아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는 힘찼고, 온몸에서 광채가 났다. 눈빛과 걸음걸이, 당당한 표정에서 그가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샌가 우고시아의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그가 가까워졌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는 길에 목이 말라 잠시 내려오게 됐습니다. 마실 물이 있을까요?"

"잠시만요!"


언니인 그리디는 재빠르게 연못으로 달려갔다. 두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가장 맑고 깨끗한 물을 퍼담았다.

그러는 사이 동생인 우고시아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모았다. 그리디와 우고시아는 동시에 오목하게 만든 두 손을 아폴론에게 내밀었다. 이런 둘의 모습에 아폴론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폴론은 우고시아의 가는 손목을 잡고, 두 손바닥 안에 담긴 이슬방울을 입술에

축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아! 그런데 이름이...?"

"우고시아 라고 합니다. 여기는 우리 언니 그리디고요."


우고시아는 언니가 소외된 게 아닐까 싶어, 다급히 언니를 소개했지만, 아폴론의 눈은 우고시아만을 향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 후, 다시 바다로 돌아온 우고시아는 차가운 바다에 두 뺨을 비벼도 달아오른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폴론은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그의 입술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의 그 감촉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본 우고시아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보기도 했다.

스스로 부끄러워진 우고시아는 금방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그리디는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온 몸을 쑤셔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아폴론은 내가 아닌 우고시아의 손을 잡은거지? 우고시아의 푸른 머리카락이 아름다워서?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연못이 아닌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모아가는 거였는데..."


그리디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폴론과의 만남을 상기했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그 반성과 후회는 점점 분노와 질투로 바뀌어갔다. 끊임없이 자신과 우고시아를 비교했다.


"왜 나는 우고시아처럼 푸른 머리카락을 갖지 못했을까. 왜 내 머리카락은 이렇게 검기만 하지...?

눈동자도 그래. 우고시아의 눈동자는 바다처럼 파랗지. 내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새카맣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사랑받지 못해서 내 머리카락은 이렇게 까맣게 태어난거야.

우고시아는 모든 사랑을 독차지 하는구나. 내가 받아야 할 사랑까지 뺏어가는 못된 것."


화가 난 그리디는 손에 잡히는대로 우고시아의 옷을 찢어버렸다. 우고시아가 즐겨하는 머리핀도 바닥에

던져버리고 사정없이 발로 밟아 깨뜨렸다.


"언니, 누가 내 옷을 찢어놓고, 머리핀을 모두 망가뜨렸어. 대체 누가 그런걸까?"

"글쎄. 대체 누가 그런 몹쓸 짓을 했을까. 우고시아 많이 놀랐겠다. 이리와. 안아줄게."

"언니. 고마워. 그리고 아버지께 비밀로 해줘서 고마워."

"당연하지. 난 네 사랑을 응원해."


그리디와 우고시아는 아폴론과 만난 이후, 동이 트기 전까지 돌아와야 한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면서

매일 그를 기다렸다. 태양신이었던 아폴론은 언제나 동쪽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때마다 그는 우고시아만

바라보며 걸어왔다. 아폴론과 나란히 걸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우고시아. 그런 둘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봐야 했던 그리디. 우고시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언니인 그리디도 아폴론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언니. 아폴론의 손은 참 크고 따뜻해. 더 오래 그 손을 잡고있고 싶은데, 시간이 야속하기만 해.

아버지는 왜 동 트기 전까지 돌아오라고 하시는 걸까."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우고시아. 우리도 조심하자. 난 앞으로 동 트기 전에 돌아올거야."

"언니, 나만 두고 먼저 돌아가겠다고?"

"우고시아. 그건 네 선택이야. 내가 돌아가자 해도, 넌 가지 않을거잖아. 그 뿐이니? 넌 이제 연못가에 가도

나와 놀지 않잖아. 매일 아폴론만 기다릴 뿐이지."

"언니, 미안해. 내가 언니 마음을 살피지 못했어."


푸른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우고시아는 일어서려는 그리디를 붙잡았다.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우고시아의 얼굴은, 여자인 그리디가 봐도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순간 그리디는 예쁜 우고시아의 얼굴을 손톱으로 힘껏 할퀴어서 다 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디 속에 있는 악마가 자꾸만 속삭였다.


'그리디, 우고시아의 두 다리를 꺾어버려. 다시는 아폴론은 만나지 못하게...'

"그렇게 한다면, 그가 나를 바라봐줄까?"

'물론이지, 그리디. 차라리 우고시아를 죽여버리는 건 어때? 우고시아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아폴론은 너를 사랑하게 될거야.'

"그...그럴까..?"


우고시아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리디가 걱정스러웠다.


"언니. 알았어. 앞으로 언니는 동 트기 전에 돌아가도록 해. 나는 내가 알아서 잘 할게."


찰싹-

악마의 속삭임에 놀아났던 그리디는 끝내 우고시아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넌 정말 고집이 세구나. 그래!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해!"


그리디는 바닥이 울릴 만큼 쿵쾅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디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두 눈은 질투와 분노로 타올랐고, 심장을 죄여오는 답답함 때문에

그리디는 있는대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다. 순간적으로 온 힘을 써버린 그리디는 곧바로 풀썩 주저앉았고

눈에서는 후두둑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 때 울고 있는 그리디를 보게 된 아버지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리디! 무슨 일이냐?"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정말 못난 언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보거라."

"우고시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이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 자 때문에 동이 트고 나서도 계속 연못가에

머물면서 놀았어요. 저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우고시아는 제 말을 듣지 않아요. 아버지...

저는 언니로서 자격이 없어요. 동생이 나쁜 길로 빠졌는데도, 바로잡아주질 못했어요. 아버지...."

"그리디...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에요 아버지. 빨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으흑흑..."


그리디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거짓의 눈물을 흘렸다. 질투와 분노가 만들어낸 그리디의 눈물은

우고시아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우고시아를 당장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거라. 다시는 우고시아가 연못가에 가지 못하도록 하라!"

"아버지.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이렇게 갇히는 건 억울해요. 아버지."

"내 화가 풀리기 전까지, 이곳에 우고시아를 가두고, 목소리도 뺏도록 하라.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우고시아를 사랑한 만큼, 실망이 컸던 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내며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목소리까지 잃게 만들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외쳐본들, 우고시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디는 그런 우고시아를 보며 쾌감에 젖었다. 또 다시 그리디 안의 악마가 속삭였다.


'잘했어 그리디. 목소리까지 빼앗긴 우고시아를 더는 알아주는 이는 없을거야.

이제 아폴론은 너만 바라볼거야.'


방해가 됐던 우고시아가 사라지자, 그리디는 한껏 자신감이 올랐다.

아폴론의 사랑을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달빛이 옅어지고 어김없이 동쪽하늘에서 전차를 타고 있는 아폴론이 내려왔다. 아폴론은 우고시아를 찾았다.


"아폴론. 우고시아는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을거에요."

"왜죠?"

"당신과의 만남이 즐겁지 않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이야기는 지루할 뿐이고, 당신과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고 했어요. 아폴론. 우고시아의 사랑은 진실되지 않아요. 금방 당신에게 질려버리고 말았죠.

하지만 난 달라요. 아폴론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당신만을 바라볼거에요."


말을 물처럼 쏟아내는 그리디를 아폴론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우고시아가 말한 크고 따뜻한 손으로,

그리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디의 두 뺨은 붉게 물들었고, 간절히 바라던 그 순간이 온 것 같아

미소가 새어나왔다. 수줍게 웃으며 그리디는 아폴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미소짓던 입술이 경직됐다.

차갑고 원망으로 가득찬 아폴론의 눈동자. 그리디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당신이 내뱉은 말에서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우고시아는 언제나 언니인 당신을 위하고 사랑했는데... 당신은 아니군요.

다시는 이곳에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당신과 눈을 마주칠 일도 없을 겁니다."


아폴론은 자신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그리디를 매몰차게 떼어내며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리디는 이대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정리한다고, 접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잊지 못할 사랑이었다.

그리디는 혹여 한번이라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까 싶어, 매일 하늘만 올려다봤다.

해가 뜨는 동쪽부터 해가 지는 서쪽까지 무심하게 지나가는 아폴론을 바라봤다.

아홉번째 날이 지났고, 아홉번째 밤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꼼짝 없이 그 자리에서 아폴론만 바라본 그리디는 자신의 발이 땅에 점점 붙어버리고 있다는 걸 알게됐다.


"괜찮아. 아폴론만 나를 바라봐준다면,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디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좀 더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자신의 팔이 푸른 줄기로 바뀌어 있다는 걸 알게됐다.

흙덩이 아래로 파고든 두 다리는 그대로 뿌리내려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고, 몸이 이전과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코와 입으로 숨을 쉬는 게 불편해졌고, 시야도 점점 좁아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이 끊어진 그리디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디가 있던 자리에는 그리디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저 그곳엔 커다란 꽃 한송이만 보일 뿐이었다.

탐스럽지만 수줍은, 태양을 닮은 꽃으로...



<그리움>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해바라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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