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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14. 2022

벼 속에 숨은 피

경계로 밀려나는 운명

 


 고기를 싫어했었다. 밥상의 고기를 보면 고기가 되기 전 동물이 생생히 떠올랐다. 소고기를 보면 소의 눈과 누런 털의 감촉이 떠올랐고, 돼지고기를 보면 돼지의 분홍색 코와 뻣뻣한 털이 생각났다. 고기를 먹는 모습이 나에게는 공포였다. 그 동물들을 생으로 뜯어먹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개고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새끼 때부터 품에 안고 다니던 개를 사정없이 죽여 잡아먹는다는 게 충격이었다. 키우던 개가 밥상에 올라오면 한동안 밥을 못 먹었다. 이렇게 허약한데 입까지 짧은 나는 어른들에게 참 많이도 혼났다. 사실 고기란 먹을게 풍족하지 않던 우리 집안에서 비쩍 마른 나를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식재료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는 참 까다롭고 유별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던하게 녹아들어 잘 지내는 게 참 어려웠다. 마당에서 혼자 누워 구름 지나가는 걸 보는 게 일이었고 혼자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며 시간 보내는 게 취미였다. 그림은 혼자서 방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었다. 그림에 몰두하면 할수록 혼자서 보내는 시간은 길고 깊었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지내는 시간을 마냥 즐기지는 않았다. 같이 할 게 없었을 뿐이지 혼자 있는 게 좋은 건 아니었다. 소외되는 건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늘 동네 아이들 무리에 끼고 싶었다. 또래들이 노는 걸 멀리서 지켜보며 망설이는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인 걸 보니 어쩌면 이게 내 타고난 기질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적 없었다


  신기한 건 이런 외톨이 기질에도 세상은 나를 어딘가에 계속 소속시켜왔다. 학교에 반에 번호를 주고 군번을 주고 직책을 줬다. 나도 좋은 집단에 속해 보고자 애를 쓰긴 했지만 세상은 항상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이, 성별, 성적 이런 것들로 줄을 세워 나를 어떤 집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집단은 때로 계급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내가 속한 집단은 대부분 낮은 계급의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경우가 많았다. 세상 사람들이 낮은 계급에 속한 나를 보는 시선도 불편했지만 같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외부의 그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위축되어 살아야 한다는 게 화나고 답답했다.


  사람의 본성인지 작은 그 집단 안에서도 서열을 나누고 서로의 역할이 나뉘었다. 나름의 규율이 있어서 서열을 거스르거나 역할을 못하는 사람은 배제당하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도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구호를 외쳐가며 소속감을 갖고 있는 시늉을 하고, 위 사람에게는 웃는 분장으로 내 역할을 열심히 다하는 연기를 했다. 잘하지는 못해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머릿수를 하나 채우는 정도는 됐던 것 같다. 하지만 어딜 가든 매의 눈으로 나와 같은 잡초를 솎아내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었다. 연기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잡초를 보는 눈이 예리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설픈 흉내는 어딜 가나 금방 들통났다.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뭔데 혼자 고상한 척하냐



  검역관 역할을 하는 사람은 늘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내 정체를 묻고 태도를 질타했다. 처음엔 그 상황이 억울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그저 속으로만 하던 ‘어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통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불편한지. 자기도 몰랐던 낯선 자가 집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심지어 가족행세를 하고 있었고, 또 그 이방인이 규율에 의문을 갖고 내 삶의 터전을 부정하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나는 그렇게까지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는데 그저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를 밀어냈다고 그 사람을 ‘악’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역할을 하며 사는 사람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저 입장이 다르고 내가 안 맞는 자리에 있었던 탓이니. 결과적으로는 내 나름의 타인에 대한 이해와 상관없이 검역관들은 나를 뽑아서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처음엔 나도 ‘그게 아니라요’라고 변명을 해봤지만 별 효과도 없었고 계속 연기하는 것도 지겨워 그냥 그렇게 쫓겨나고 또 밀려났다.


저대로 놔두면 금방 피논되는겨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취업에 실패하면서 생활비가 몇만 원 단위로 떨어지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있으면 그래도 품값은 벌 방법이 있었다. 푹푹 찌는 한 여름, 농사짓는 형님을 따라 풀약을 한 트럭 싣고 논에 물을 보러 갔다. 내 눈에는 다 같은 벼인데 형님은 ‘웃자란 벼’, ‘쭉정이 벼’, ‘삼광’, ‘새누리’ 이런 말을 하며 벼를 구분했다. 평생을 벼 농부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쌀을 맺는 이 풀이 수많은 이름을 갖고 있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물로 다가오는 듯했다.  또 논을 보면 주인의 성격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욕심부려 많이 수확하려고 비료를 너무 많이 뿌려 시꺼멓게 웃자란 벼, 게을러서 물관리를 안 해고 바짝 마른 벼, 그중에서도 가장 욕을 먹는 건 잡초가 많은 논이라 했다. 주변 논으로 잡초가 퍼져서 다 같이 농사를 망치는 민폐스러운 사람. 그게 잡초 많은 논 주인에 대한 평이었다.


  신기한 건 내 눈에는 잡초가 없는데 형님의 눈에만 잡초가 보였다. 그 잡초는 ‘피’라는 종이다. 조, 피, 수수 할 때 잡곡에 들어가는 식물이지만 벼농사를 지으면서는 그래 봐야 잡초다. 피는 벼들 사이에서 마치 벼 인양 숨어있었다. 좀 자라면 키가 훌쩍 커버려 들통나지만 그 전에는 이렇게 고수가 아닌 다음에야 벼와 구분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이 피가 번식력이 좋아서 금세 논을 뒤덮는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피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형님도 논을 슬슬 걸어가면서 피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뽑아서 논두렁에 말려 죽였다. 내 눈에는 벼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풀이었는데 형님이 ‘피’를 말할 때마다 징글징글하다는 그 표정에서 얼마나 벼농사에 암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경계로 밀려나 말라죽는 운명


  사회생활을 한참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언젠가 한여름 봤던 논의 잡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 흉내를 내며 숨어있어 봐야 금방 들통나서 경계로 밀려나고 거기서 말라죽는 삶. 밀려나 볕에 말라죽는 나나, 필요대로 길러지다 낫에 베어 죽는 너희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위안을 삼으며 살았지만 결국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휩쓸려온 땅에서 배척받고 소외되고 변두리에서 살다 죽는 인생.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고 민폐를 끼치는 삶.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너무 억울하고 슬프지 않나. 나도 사랑받으며 자라온 평범한 사람인데. 나라는 사람이 발 디디고 뿌리내릴 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내 자리가 진짜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돌아보니, 또 앞을 보니 내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불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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