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복의 주인을 찾는 과정
세상에 던져지고 나서 내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일거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건 자아실현도, 윤택한 삶을 위함이 아니라 당장 내일, 다음 주를 위한 걱정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안 오는 공포였고, 생존의 문제였다. 폭탄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일을 찾기 시작했다. 온라인 구직 사이트를 하루 종일 긁어 내려가며 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주변 사람들이 도서관에 앉아서 하는 ‘취준’은 먼 얘기였다. 그저 친구 어머니가 주신 가래떡에 고추장을 찍어먹으며 품을 팔면서 근근이 살았다.
밥 값도 못하는 쓸모없는 놈
떠밀리듯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험한 욕을 듣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그건 적어도 뭔가 하고 있다는 거니까. 있는 듯 없는 듯 찢어진 자루 옆에서 멀뚱멀뚱 서있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욕은 “밥값도 못하는 쓸모없는 놈”이었다. 아직도 그 경멸하는 표정과 행동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그때의 나는 적잖이 충격을 먹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람이 새파랗게 어린 나에게 했던 말이 어른으로서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기보다 절규였던 것 같다. 피 같은 자기 돈을 쪼개서 일을 부리는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시다 2’가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까. 그곳은 선배 후배를 따지기엔 너무 삭막하고 절박했다.
그쯤부터 나는 ‘쓸모’에 대해 고민했다. 살아남으려면 쓸모가 있어야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제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세상에 쓰일 나의 구석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고, 다들 추운 날씨에 자다 깬 눈을 껌벅이며 어렵게 구한 자기 자리로 가서 누군가를 위해 발버둥 치며 하루를 보낸다는 걸 알았다. 자기 역할을 찾아서 쓸모가 남아 있는 날까지 애쓰며 살다 가는 삶. 수만 가지 사람의 인생을 감히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겠냐마는 내가 그 당시 깨달은 삶은 그랬다.
기성복의 주인을 찾는 과정
쓸모가 많은 사람은 되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야 하는 기술이거나, 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자격, 학위이거나, 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얻을 수 없는 재능이나 배경도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정해놓고 거기에 최대한 가까운 재료를 찾는 과정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인재’, ‘자원’ 이런 단어들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을 뒤돌아보면 세상에서 찾는 그 인간상에 가까운 친구들이 간혹 있었다. 당연히도 그 친구들은 공부를 잘했다. 열심히도 했겠지만 그 친구들의 “이게 왜 어려워?”하는 표정을 볼 때마다 저건 분명히 엄마 뱃속에서 예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생긴 대로 일상을 보내는데 척척 들어맞는 그 기분은 어땠을까.
어김없이 나는 그 과정이 정말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쥐가 나도록 외계어를 머릿속에 구겨 넣고 찬물로 세수하고 운동장을 뛰고 밥 먹으며 단어를 외우고 쉬는 시간에도 책을 봤다. 그 친구들처럼 딱 맞는 몸은 아니더라도 기성복에 팔 한쪽은 끼우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애썼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수험 성공수기를 읽으면서 나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시켜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가를 생각하면 그저 남들이 하니까, 가족들을 위해서, 이런 답밖에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남의 옷에 나를 맞추겠다고 뼈와 살을 깎고 있던 시간이었다.
사회에 나오니 나는 그 기성복의 주인들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많은 걸 외우고, 말과 글로 된 누군가의 언어를 잘 알아듣는 사람들. 그들이 짜 놓은 세상에서 허둥지둥 일거리를 찾아다녔고, 내가 할 수 있는 귀퉁이를 간신히 찾아서 아침부터 밤까지 나를 갈아 넣었다. 처음에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돈을 받았고 나중에는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을 받았다. 그래도 이 빈틈없이 살벌한 세상에서 내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줬다. 내 몸 건사하며 한 달을 걱정 없이 산다는 게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양지에서 말라죽는 고사리
그렇게 근 10년이 다 되어 갑작스레 일상이 멈췄다. 아프다기보다는 얼어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더 이상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머리는 굳어져서 숨만 쉬고 있는 나무토막이 되어버렸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또 잘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장마에 논둑이 무너지듯 어느 순간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무의식 중에 쌓여온 자괴감과 피로가 터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시체처럼 며칠을 누워있다가 바싹 마른 몸과 산발이 된 머리로 거울을 보니 어머니가 옥상에 말리던 고사리가 생각났다. “옥상 장독대에서 말라 웅크린 고사리같이 생긴 이 사람은 흰머리가 늘고 몸이 병들면 버티기를 그만두고 어느 요양원의 천장 형광등을 보다가 눈을 감겠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을 오래도 혹사시켜 왔다는 생각을 했다.
봄비가 오면 산으로 가서 따오던 고사리. 숲 속에서는 그렇게 청아한 초록색 잎과 생생한 순을 가졌지만 이쁘다고 양지에 심으면 금방 말라죽었다. 고사리는 원래 적당히 어둡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 그런 환경에서 태초의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식물들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숲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지켜온 생물이다. 물을 머금고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나무의 거름이 되어 숲의 한 부분으로 살았다. 그 가치는 우리가 봄날 몇 개 꺾어먹고 몸을 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봄날, 고사리 꺾으러 올라간 축축한 산속에서 사방에 아기 손 같은 순을 하늘로 뻗어 올린 그 경이로운 모습. 고사리의 본모습은 그날 내가 본 그 풍경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의 내 삶은 양지에 뿌리내리려 애쓰던 고사리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볼품없는 풀이라도 모두 나름의 역할과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렇지 않겠는가. 척박한 곳에서 천대받으며 살아온 나는 ‘나’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나라는 생명체를 오랫동안 내려다본 누군가가 있다면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 볕을 좋아하는지 그늘을 좋아하는지 모래땅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지 부엽토를 좋아하는지.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자세히 알고 있다면 식물들이 지구에서 생존하며 자기 역할을 하듯이 그저 나도 내가 생긴 대로 살면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