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까의 삐딱하게 ②
스마트폰을 안 쓴다. 대신, 구형 핸드폰 쓴다. 전화와 문자만 가능하다. 가끔 새로운 누군가와 대화할 때가 있다. 내 핸드폰 발견한 상대가 “어머~ 요즘도 이런 핸드폰 쓰는 사람이 있네요? 스마트폰 왜 안 쓰세요?”라고 묻는다. 그럴 때면 늘 똑같이 대답한다. 이때 포인트는 ‘그윽한 눈빛’이다.
“이렇게, 서로 눈 마주 보면서 대화하고 싶어서요. 하하하.”
“(뭐래.)…….”
스마트폰 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벌써 오래전이다. 어느 순간, 내가 스마트폰 노예라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아니 잠든 후에도(잘 때 노래나 팟캐스트 켜놓고 잤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열심히 SNS하고, 틈만 나면 기사 찾아 읽었다. 침대에 누워서는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켰다. 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샤워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붙들었다. 배터리가 20% 이하로 떨어지면 초조하고, 어쩌다 손에 없으면 불안해 참을 수 없었다.
이 망할 놈의 스마트폰 때문에 난 두 가지를 잃고 있었다. 우선은 인간관계. 애인과 가족, 친구 만나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앞에 앉은 상대가 무슨 얘길 하든가 말든가, 스마트폰 영상 속 주인공의 다음 대사가 궁금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야! 스마트폰 내려놓고 얘기 좀 하자고. 그건 집에 가서 보고~!!”
“알았어. 딱 5분만. 여기까지만 보고.”
“아이씨! 이럴 거면 뭐 하러 만나자고 했어. 나 그냥 집에 간다??”
그런 상황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모른다.
근데, 돌이켜보면 예견된 ‘사고’였다. 일찍이 우리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술을 못 마셔서 그렇지, 술 잘 마시는 사람이었으면 벌~써 알코올중독자여.”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난 좀 집요한 데가 있다. 꽂히면 판다. 줄곧 그랬다. 지금도 하루 담배 2갑 이상 피운다. 학창 시절엔 도서 대여점에 있던 만화책을 전부 읽고 나서야 헤어 나올 수 있었다. 20살 땐 RPG 게임에 빠져 석 달을 PC방에서 죽쳤다. 몇 해 전부터는 식물 키우기에 빠져 집에 크고 작은 식물만 100가지가 넘은 적도 있다. 언젠가는 캠핑에 빠져 장비 사느라 얼마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 나다. 그러니 세상의 온갖 걸 손바닥 위에서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에 안 빠질 재간이 있나.
두 번째로 잃은 건 ‘정체성’이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전~혀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이건 인간관계 무너진 것만큼이나 나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20대 중후반까지, 그러니까 회사 생활 시작하고 스마트폰이라는 게 대중화되기 전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과-국문과-학보사-잡지사-출간 작가로 이어진 내 인생 궤적도 거기에 뿌리를 둔다. 그랬는데 차츰 책 대신 스마트폰을 보더니만, 이후엔 본격적으로 스마트폰만 봤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스마트폰 없애기 직전, 1년에 10권이나 읽었을까 싶다. 이건 마치, 외식이라고는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하는 사람이 ‘외식 경영전문가’ 타이틀 달고 컨설팅하러 다니는 꼴이다. 이건 아니지 싶었다.
최애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드라마 작가’가 직업인 주인공은 “쓰자. 작가는 글을 써야 작가다.”라고 했다. 그렇다. 작가는 글을 써야 작가다. 글을 쓰자면 뭐가 됐든 읽어야 한다. 결론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다. 작가로 계속 살아가자면 스마트폰을 없애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먹기는 쉬우나 실천이 어려운 법. 무엇보다 두려웠다. 정보에서 뒤처질까 봐, 관계에서 멀어질까 봐, 생활이 불편해질까 봐, 삶의 질이 떨어질까 봐 등등……. 수많은 핑계와 변명을 꾸역꾸역 만들어냈다. 미루고 또 미뤘다. 그사이 나는 점점 바보가 되고 있었다.
계기는 엉뚱한 방향에서 찾아왔다. 때는 바야흐로 2022년 3월이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다.(이렇게 커밍아웃할 줄이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나와 다른 결과를 원했고, 그렇게 쟁취한 사람들이 미워질 것 같았다. SNS에 넘쳐나는 관련 이슈와 뉴스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참에 잘 쓰던 스마트폰이 ‘개박살’ 났다. 저장된 번호와 사진, 각종 앱에 담긴 정보와 데이터가 말끔하게 다 날아갔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래, 이참에 스마트폰과 이별하자.
종이와 펜을 꺼냈다. 스마트폰 없앴을 때 포기해야 할 모든 가능성을 적기 시작했다. SNS와 카톡, 뉴스, 드라마와 영화, 은행 업무, 음악과 팟캐스트, 내비게이션과 지도, 일상적인 정보 검색과 실용적인 앱(이를테면 당근, 또는 당근이나 혹은 당근)까지. 나열한 리스트에서 우선 대체 가능한 걸 골라냈다. 시시각각 피드백할 순 없어도 컴퓨터로 대체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SNS와 PC카톡, 은행 업무 같은 거. 그런 다음, 대체 불가능하지만 안 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걸 다시 골라냈다. 쓸데없는 앱과 의미 없는 웹 검색 같은 거. 그렇게 전부 골라내고 나니, 몇 개 안 남았다. 이것 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것들. 이를테면 당근이나 또는 당근, 혹은 당근 등등. 의외로 간단했다. 당근만 포기하면 되는 거였다! 이럴 수가.
구형 핸드폰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가깝다. 내 삶은 분명 변했다. 처음 얘기했듯, 사람 만나면 눈 마주 보며 대화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대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는 요즘이다. 애인, 가족, 친구, 동료와 통화도 잦아졌다. 카톡 없는 나와 소통하자니 답답한 모양이다. 문자 몇 개 주고받다가 곧 전화가 온다. “아씨 답답해. 야! 전화로 말해.” 감정 없는 글자 나열보단 아무렴 온기 담긴 목소리가 100배는 낫지.
독서량도 늘었다. 애당초 TV조차 없던 집에서 그나마 이제 할 거라곤 책 읽는 것밖에 없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다. “책은 읽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것 중에 읽는 것”이라고. 내가 딱 그렇다. 애서가이면서 장서가인 나는 스마트폰 노예 시절에도 꾸준히 책을 샀다. 요즘 그 시절 사둔 책 읽느라 정신없다.
라디오는 또 어떻고. 노예 시절, 단 1초도 진공 상태를 못 견뎠다. 차에 타거나 집에 오면 노래부터 틀었다. 집안일 할 때나 잠잘 땐 팟캐스트를 들었다. 그걸 라디오로 대체했다. 그러고 나니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한때는 열렬히 좋아했으나, 언젠가부터 까맣게 잊었던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 평소 같으면 아예 안 듣는 장르의 노래가 내 귀에 꽂힐 때. 눈물 콧물 짜게 만드는 어떤 이의 사연이 흘러나올 때.
물론, 스마트폰이 없어 때때로 난처하거나 아쉬운 순간도 있다. 따스한 오후, 드라이브 가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지금 상황과 꼭 어울리는 노래가 퍼뜩 생각났는데 그 노랠 지금, 이 순간, 들을 수 없을 때. 친구와 어디에서 만나기로 하고, 한참 기다리는데도 친구가 오지 않아 전화해 봤더니 “아씨~! 바뀐 장소 카톡으로 보냈는데, 너 카톡 안 하는 거 깜빡했다. 문자로 다시 보내줄게.”라고 할 때. 무언가를 사려는데 난 카드밖에 없고, 상대는 현금이나 계좌이체 요구할 때. 이 물건이 당근에 무조건 있을 것 같고, 새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할 것 같은 확신이 들 때. 거꾸로 버리자니 아깝고, 갖고 있자니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 수시로 눈에 띌 때. 어쨌거나 당근 또는 당근, 혹은 당근이 필요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과 이별한 후 인간관계는 전보다 훨씬 친밀해졌으며, 양질의 유익한 정보를 더 많이 ‘읽게’ 됐고, 삶의 질은 2만 7천 배쯤 올라갔다. 나처럼 고민하는 자가 있다면 주저 말고 실행하시라.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건 당신의 근처, 당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