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 나온 여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센느강 다리 위에서 맞는 비는 마치 폭풍우 같다. 다리가 흔들릴 듯 아슬아슬하다. 나름 낭만적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여자의 스카프와 코트자락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주변에서는 웃음과 비명이 어우러져 유쾌하게 들려온다. ‘파리는 바람마저 낭만적이구나,’ 여자는 생각한다. 에펠 타워를 등지고 다리 위를 뛰듯 걸어간다. 아치형 간판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연인의 뒤집어진 우산을 챙겨주는 커플의 모습 또한 낭만적이다.
현실 속 그녀는 로맨틱하지 않았다. 우박을 뚫고 센 강을 건너던 그 순간은 필터도 없고, BGM 도 없었다.
여자의 이야기도 로맨틱하게 서술해 볼까?
미술관에서 나온 그녀는 비를 맞으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서 남자 주인공이 비 오는 파리 거리를 즐기는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의 향수에 젖어, 그녀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밖으로 나간다.
마침 미술관에서 좋아하는 작가 베르나르 뷔페의 도록을 15유로에 사게 되어 기쁘다.
한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발목까지 오는 긴 코트가 비를 맞고 있는 그녀를 더욱 파리앵처럼 보이게 만든다.
…
아… 안되네. . .
파리에서 비가 낭만적이게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손에 짐이 없어야 한다. 가장 중요하다!
둘째, 집(호텔)까지 거리가 10분 이내여야 한다.
셋째, 연인과 여행 중이거나 데이트 중이어야 한다.
센느강 다리 위를 건널 때, 비가 우박으로 바뀌면서 여자의 안경이 날아간다. 안경이 강으로 다이빙하기 직전에 겨우 잡고, 몇 시간 전에 샀던 망고 쇼핑백은 구멍이 나서 옷이 빠져나갈까 봐 종이 가방과 도록을 끌어안고, 빗속, 아니 우박을 뚫고, 얼굴로 우박을 맞으며 건너간다. 신발은 물에 젖어 점점 어두워지고, 바지 끝단은 이미 무겁다. 여자는 짐이 많고, 호텔까지 걸어서 50분 거리에 있었다. 여행 중이긴 했으나, 순간을 공유하기에는 인스타그램이 전부였다. 파리에서 비 맞는 여자는 로맨틱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 덕에 파리에서의 비 맞은 여자는 주인공이 된다. 비 맞은 자신을 셀피로 기록하고 있을 때, 마침 3년전 파리로 온 S로부터 전화가 온다.
“나 완전 비 쫄딱 맞았어.”
“에펠 타워 근처에 있어! 움직이지 말고, 금방 갈게.”
이제 여자의 진짜 파리의 로맨스가 시작될까?
Her Romance
S와 여자는 5년 만에 만났다. S는 과거 여자에게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자는 S와의 만남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리라는 공간은 묘하게 감정의 거리를 흐리게 만들었다. 서로에게 지나간 시간은 이제 과거였고, 둘은 다시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평생 못 볼 줄 알았는데, 파리에 와서 다시 보게 되다니….’
“나 또 들어가 봐야 해,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지금도 일하다 말고 나온 거야. 보이지?” S는 계속 들어오고 있는 문자들을 보여주며 여자의 얼굴을 힐끗 본다. S의 눈에 여자는 변한 게 거의 없다. 보고 싶었다.
“뭐, 맨날 이렇게 다 urgent래! 내가 이렇게 산다. 같이 오래 있지도 못하는데 얼굴 좀 보자. 잘 지냈어?”
마침 빨간불로 바뀐 신호등에 둘은 마주본다. 여자는 S를 타국에서 보니 반갑긴 하다. 파리의 자동차는 느리기만 하다. 파리 시장의 공약이 차를 없애는 것이 라나 뭐 라나. 옆에서 쌩쌩 달리는 자전거가 더 빠를 판이다. 그렇게 걸어서 30분 거리를 차로 30분 걸려 호텔에 도착한다.
“옷 갈아입고 나올 게. 주차하고 있어.”
“얼마나 걸려?”
“10분? 15분?”
여자는 호텔 방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로 씻으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젖은 신발은 어쩔 수 없지, 신발이 한 켤레밖에 없으니.’ 신발을 드라이기로 말리며 카톡을 확인한다. S는 호텔에서 2분 거리에 주차하고 카톡으로 위치 공유를 보내 놓고 노트북을 꺼낸다. 파리에서 일한 지 3년 차가 되어 팀장으로 승진하고 일이 계속 많아졌다. 요즘에는 일을 후배들에게 시킬 수가 없다. 있어도 믿을 수가 없다. 시켜서 다시 해야 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위아래로 일을 몰아주기 한다. 이런 시국에(COVID-19) 임원들은 왜 파리 지사까지 와서 일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여자와 S는 갓 스무 살이 넘고 S가 군대를 다녀왔을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은 서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잘 될 기회는 없었다. 여자는 대학 4년 내내 M과 캠퍼스 커플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 선물 이후였다. 언젠가 기대하지 않았던 야릇한 책 선물을 받고 나서부터 S는 여자가 자신에게 보내는 시그널이라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토론을 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너만 이거 받았지? 무슨 생각으로 줬을까?”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긴 했어. 그렇지 않고서 나한테만 이걸…” 그때부터였다. 틈만 나면 여자를 만나려 했고 친구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고 그 집착을 자이가르닉 효과를 들먹이며 정당화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파리로 오게 되면서 몇 년간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S는 1년 전 한국에 다녀갔었다. 그때도 S는 여자가 보고싶어 연락을 했지만 역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지금, 파리에 있다.
호텔에서 1분 거리에 조그마한 와인 바가 있다. S는 능숙한 불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와인을 고른다. 자신이 멋있어 보이길 바란다. 그러나 바텐더는 잘 못 알아듣는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되묻는다. S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여자는 그런 S를 보며
‘그냥 영어로 하지, 파리 로맨스, 너 랑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하마터면 프렌치 후광에 넘어갈 뻔.
여자는 S와의 시간을 낭만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속엔 프라하에 있는 Q가 있었다.
S는 선배의 전화를 받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일어난다. 여자는 호텔에 들어가서 젖은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아 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